(수정) 열국지( 001∼94회 ) 94

제 84 화. 군주가 편협하면 쫓겨난다.

제 84 화. 군주가 편협하면 쫓겨난다. 송장공(宋莊公)은 정장공(鄭莊公)이 살아 있을 때까지는 약속을 잘 지키며 조용히 따랐으나, 정장공이 죽고 나서 세자 홀(忽)이 정소공(鄭昭公)으로 즉위하고 나자, 마음이 바뀌었다. 송(宋) 나라 옹씨(雍氏) 집안의 아들인 공자 돌(突)이 군위에 오르는 것을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송장공(宋莊公)은 마침 제족(祭足)이 사신으로 온다고 하자, 이를 빨리 간파한 옹(雍) 대부의 말을 듣고, 제족(祭足)을 통하여 공자 돌(突)을 정(鄭) 나라의 새로운 군주로 세울 작전을 꾸미게 된다. 신. 정(鄭) 나라 상경 제족(祭足)이옵니다. 송후(宋侯)께 안부 인사를 올리나이다. 약소(略少) 하오나 예물을 받으시옵소서! 정소공(鄭昭公)의 즉위를 축하하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가 ..

제 83 화. 분열하면 나라가 망한다.

26. 형제들의 분열. 제 83 화. 분열하면 나라가 망한다. 정(鄭)나라 정장공(鄭莊公)은 수갈(繻葛) 전투에서 주환왕(周桓王)의 왕사군(王師軍)을 물리치고 돌아오자, 곧바로 논공행상에 들어갔다. 수갈(繻葛) 전투의 일등공신은 공자 원(元)이로다. 역읍(櫟邑)을 그대에게 주고 부용(附庸)을 삼겠노라! 부용(附庸)이란, 속국(屬國)이란 뜻으로, 기존의 읍(邑)과는 개념이 다르면서 엄연히 하나의 나라를 말한다. 다만 경제적, 군사적으로 독립하지 못했을 뿐으로 일종의 식민지라 할 수 있다. 당시 이웃한 소국을 병탄하여 부용(附庸)으로 삼는 경우는 많았으나, 읍(邑)을 부용(附庸)으로 승격시키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따라서 역읍(櫟邑)을 부용으로 승격시킨 것은 일종의 파격적인 처사였다. 역읍(櫟邑)은 큰 읍..

제 82 화. 초, 왕호를 참칭 하는가.

제 82 화. 초, 왕호를 참칭 하는가. 그때 주환왕(周桓王)은 정(鄭) 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낙양에 돌아와 정(鄭)의 축담(祝聃)에게 얻어맞은 왼쪽 어깨의 화살 상처를 한동안 치료를 받으며 마무리하고, 겨우 정무(政務)에 복귀하였을 그때, 수후(隨侯)를 비롯한 남방의 제후들이 찾아온 것이다. 수후(隨侯)가 왔다고 하였느냐? 수후(隨侯), 혼자 온 게 아니로구나! 수후(隨侯)는 어찌하여 여러 명의 제후(諸侯) 들과 함께 아무 기별도 없이 찾아왔는가? 남방에 무슨 좋은 일이 있는가? 수후(隨侯)는 어서 말해보라! 주상의 만수무강(萬壽無疆)을 바라나이다. 여러 제후는 무슨 일로 찾아온 것이오? 우리 남방 나라의 아래쪽인 장강(長江) 주변에 오랑캐! 만이(蠻夷) 족들이 자주 출몰하여 우리와 여러 부족들을 괴롭..

제 81 화. 초나라, 날개를 펴는가.

제 81 화. 초나라, 날개를 펴는가. 초(楚) 나라와 꼭 싸워야 하겠는가? 소사(少師)는 어서 말해보라! 저들은 우리를 두려워하는바 맹약을 맺자마자 허둥지둥 철군하는 허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신이 나아가 싸운다면 초군의 절반을 포로로 잡아 올 수 있사옵니다! 이 기회에 다시는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초(楚) 나라를 섬멸시켜야 하옵니다. 주공. 이 소사(少師)를 믿으시옵소서! 주공! 저들을 쉽게 무찌를 수 있사옵니다! 수후(隨侯)는 소사(少師)의 말을 굳게 믿으면서, 그를 오른쪽에서 수후(隨侯)를 보호하는 융우(戎右)로 삼았고, 계량(季梁)을 수레를 책임지는 어(御)로 삼아, 청림산(靑林山) 밑에 진을 치게 하고 초군(楚軍)의 침략을 방어하기로 하였다. 주공, 신, 계량(季梁) 이옵니다. 청림산(靑林山) ..

제 80 화. 약한 모습 만을 보인다.

제 80 화. 약한 모습 만을 보인다. 초(楚) 나라 군영에서는 수(隨) 나라 사신으로 소사(少師)가 온다고.하자, 웅통(熊通)은 회의를 열어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신 투백비(鬪伯比) 이옵니다. 소사(少師)는 천박한 간신(奸臣)으로 아첨을 잘하여 수후(隨侯)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하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저자는 우리를 염탐하러 오는 것이옵니다. 어떻게 대비하면 좋은지 말해보시오? 우리의 허약한 모습을 만들어 보이셔야 합니다. 우리 군사들을 늙고 허약하게 보이 오면 저자 소사(少師)는 오만해질 것이며 그리되면 수(隨) 나라는 나태해지게 되옵니다. 저들에게 그렇게 보아야만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부릴 수가 있사옵니다! 신 대부(大夫) 웅솔(熊率) 이옵니다. 저들에겐 현신 계량(季梁)이 있..

제 79 화. 초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25. 초나라의 등장 제 79 화. 초나라는 어떤 나라인가. 세상은 하나의 일이 수습되어 조용해질 만하면, 예측하였거나, 예측하지 못한 또 다른 일이 생기면서, 세상의 어지러움을 이어가게 하는 모양이다. 중원(中原) 천하의 주(周) 왕처럼, 자기도 똑같이 스스로 왕이라 칭하면서, 이제는 오히려 주(周) 왕을 쫓아내고, 중원(中原)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도전(挑戰)하는 나라가 생겨난다. 어느 나라나 그 상고시대는 전설과 신화로 이어져 오다가, 문자가 만들어지면서 기록이 되고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를 증명하여주게 된다. 중국 또한 문명의 창시자라 부르는 삼황(三皇)과 오제(五帝)에서 역사가 시작하였다고 한다. 여러 설이 있으나 상서대전(尙書大傳)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삼황(三皇)은 수인(燧人). 복희(伏羲)...

제 78 화. 맺힌 한은 풀어줘라.

24. 진나라 평정 제 78 화. 맺힌 한은 풀어줘라. 정장공(鄭莊公)은 주 왕실에 바치던 조공도 끊어버린 지 이미 오래되었으며 왕실을 무시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더구나 수갈(繻葛) 전투에서 왕사군을 이김으로써, 제후와 왕의 권위가 대등해지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왕을 신봉하며 왕명에 따르던 봉건 사회의 전통사상이 무너지는 시점이 되고 있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천하를 도모하겠다는 큰 뜻을 가진 제후들이 나타나, 약한 제후국을 점령하여 합병시키는 쟁탈전이 춘추시대에서 뜨겁게 펼쳐진다 또한, 수갈(繻葛) 전투부터 어리진(魚麗陳)의 진법을 적용(適用) 함으로써 병거(兵車)가 중심이 되어 싸우던 전술에서, 뒤따르던 보병이 스스로 작전을 펴면서 유기적으로 합해지며 합동 작전을 펴게 되는 새로운 전술에 ..

제 77 화. 병을 주면 약도 줘라.

제 77 화. 병을 주면 약도 줘라.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주환왕(周桓王)은 30리 밖으로 물러나게 되며 겨우 어가(御駕)를 세우고는, 다시 진채(陣寨)를 세우게 하면서 치중(置重)과 병거(兵車)를 모두 점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주상, 진(陳) 나라 군사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패배(敗北) 하게 되었사옵니다. 인제 와서 진군(陳軍)을 탓해 무얼 하겠소? 모두 짐(朕)의 용병술(用兵術) 책임이오. 각 군을 잘 운용하지 못한 짐(朕)의 잘못이오. 다시 각 군을 정비하여 싸울 준비를 시키시오! 이제 마지막까지라도 정군(鄭軍)을 혼내줘야 하오! 주상, 참으셔야 하옵니다! 지금은 왕사군의 사기가 꺾였으니 돌려보내시고 일단 돌아가시어 다시 준비 하시옵소서! 정군(鄭軍)의 장수들이 후퇴의 징을 울린 것에, 다 같이 아쉬..

제 76 화. 패하지도 이기지도 않는다.

제 76 화. 패하지도 이기지도 않는다. 우리도 수갈(繻葛) 땅에 나아가 방어선을 치리라! 자, 우리 정군(鄭軍)도 수갈(繻葛)로 나아가라! 정군(鄭軍)이 왕사군이 있는 수갈(繻葛) 땅 가까이에 진군하여, 공자 원(元)의 계책대로, 세 곳으로 나누어 진채(陣寨)를 세운다. 정군(鄭軍)이 맞서겠다며 수갈(繻葛) 땅에 진채를 세우자, 이를 지켜보던 주환왕(周桓王)은 크게 분노하며 큰 소리로 말하였다. 정장공(鄭莊公)이 사자를 보내어 용서를 빌기는커녕, 한판 붙자는 것이 아닌가? 사죄해도 분이 풀리지 않는데 대항하려 든단 말인가? 왕사군은 쫓아가 저 정장공(鄭莊公)을 잡아 오도록 하라! 주상, 아니 되옵니다! 주상. 괵공(虢公) 임보(林父)의 말을 들어보시옵소서 정장공이 용서를 빌러 올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급..

제 75 화. 슬기롭게 대항할 것이냐.

제 75 화. 슬기롭게 대항할 것이냐. 주공, 신 제족(祭足)이 한 말씀을 더 올리겠나이다. 주공, 이번에 만약 왕과 싸움을 벌인다면 이겨서도 아니 돼 오며. 그렇다고 져서도 안 되는 어려운 싸움이 되고 맙니다. 주공, 용서를 빌면 왕사군이 돌아갈 것이오니 너무 무리한 일을 벌이지 마시옵소서! 주(周) 나라가 동쪽의 낙양(洛陽)으로 천도(遷都)한 후에, 아무리 왕실의 권위(權威)가 땅에 떨어졌다 하더라도, 주환왕(周桓王) 때까지만 해도, 명색이 왕이 이끄는 왕사군이었기에, 함부로 무력으로 맞서 싸운다면, 천하 제후의 공적(公敵)이 될 수도 있었으므로, 여간 부담이 큰 것이 아니었다. 이때가 주환왕(周桓王) 13년이며, 정장공(鄭莊公) 37년의 일로써, 기원전 707년에 해당하던 해였다. 주환왕(周桓王)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