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이야기

아리랑의 뿌리 1.

서 휴 2024. 3. 29. 16:34

아리랑의 뿌리 1.

서 휴

 

 

      아리 랑 아리 랑 아라 리오.

      아리 라 아리 라 아리 라오.

      오리강 오리강 오리 강이라오.

 

옛날 우리 조상님 들은 물에 사는 오리(鴨) 아리라 부르고

흐르는 강(江) 라고 하며, 들판을 또는 라 불렀다.

 

산(山) 라 부르며 소나무(松) 아사 라 불렀기에

소나무가 많은 산(山)이라 해서 아사달이라는 산(山) 이름이

생겨나고, 대동강을 펴라라 부르며 있는 들이 평양이 됐다.

 

       우거진 숲을 가리 라 부르고,

       숲속을 흐르는 강을 가리 라라고 불렀으며,

       물이 많은 늪지대를 가라라고 불렀다.

 

가라라는 나라이름은 한문으로 가락국이라 쓰여 지게 되며

질펀한 들판을 가야라고해 가야나라는  가야이 되었다.

 

       한글이 없던 시절이라 한자의 음으로

       표시하다 보니 우리말이 많이 변형되었다.

 

몽골 들의 말에도 우리의 압록강 아리 나레라 부르고

한강 아리라 불렀으며, 물은  라 하였기에 

아리에  물을 붙여 한강 물이 아리수가 되었다.

 

할라는 저 멀리 구름 위에 우뚝 솟아있는 검푸른 으로

할라에 뫼 산(山)이 붙어 라 산이 되며 한라산으로 쓰인다.

 

       아라 (我)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신(神)을 가리킨다

       아라 한은 큰 사람이라고 하니 우두머리일 것이다

 

오리인 아리는 물이 퍼져있는 곳에 많이 모여 사니, 그곳엔 

아리 먹거리가 많았을 것이다.

 

       아리가 많이 모여드는 곳은 물이 많는 강이나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나, 또는 늪지대일 것이며

       이러한 곳은 사람에게도 먹을 것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계 어느 곳이나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강에서 시작된다.

 

     아리랑은 살기 좋았던 우리의 옛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아닐까.

     아리라가 변해 아리랑이 된 건 아닐까.

 

아리랑에 대한 해석은 많기도 하지만, 아리가 많이 사는 곳이었던

우리 고향을  떠나게 되면서, 그리워 하는 마음이, 오랜 세월 동안

마음 깊이 쌓이고 새겨지면서, 그리워하는 노래가 된 것 같다.

 

그리워하는 이 쌓이게 되면, 아리랑 노래를 힘차게 부르면서,

어려움을 딛고 일어나려는 개척정신을 솟아나게 하는 노래같다.


       어느 사전에서도 나오지 않는 대부분의 우리 옛말들이

       조선 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많이 보인다.

 

조선 상고사(朝鮮上古史)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지으시고, 박기봉(朴琪鳳) 선생이 이해하기 쉽도록 펴낸 책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짧은 세월 동안 너무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우리 상고 역사를 많이 쓴바

       천재적인 사학자(史學者)라 부를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의 상고사를 정립시키고자 국내는 물론이며

옛 고구려 벌판과 요하 지역과 연해주와 북경과 남경으로

상하이까지 다니며, 우리 역사의 흘러간 실상을 보며 탄식한다.

 

      송도를 지나면서 만월대를 쳐다보라.

      반쪽짜리 기와인들 남아있더냐.

      초석 돌 하나가 남아있더냐.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 아니더냐.

 

      .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李朝)의 부항(父行)으로

      멀지 않은 고려조(高麗朝)의 궁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전설도 없는데

      어찌 이같이 무정한 유허(遺墟)만 남았느냐.

 

      이와 같은 예로써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을 수 없고

 

      평양에서 고려의 구형(舊形)

      볼 수 없는 실정이구나.

 

단재 신채호 선생은 1145년경의 고려(高麗) 인종왕(仁宗王) 

김부식(金富軾)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넓은 대륙에 살았던 

우리 고구려, 신라, 백제 인들의 넓은 대륙을 부정하고 말았다.

 

       그때의 우리 땅 이름을 압록강 아래인 한반도 안으로

       끌어내려 우리의 넓은 땅을 잃어버리게 한 것이다.

 

김부식은  일본이 아주 편협(偏狹) 생각으로 우리역사를

왜곡시키는데 맨먼저 앞장선 인물이라면서 몹시 미워했다.

 

       조선 상고사를 읽다 보면  고려사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이 얼마나 왜곡이 심한가를 알게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상고사를 바로잡기 위해 사료를 찾아

헐벗고 굶주리는 고난을 스스로 택하며 살았다.

 

      교사 생활을 하며 편히 살수도 있으련만 많이도

      굶어가며 북경대학 도서관에 파뭍히기도 했다.

 

      주요한 책을 돈이 없어 사지못해 빌려서

      겨우 읽어가며 자료를 만들고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사지 못해 잠시 읽고

      직접 찾아가 더듬어가며 글자를 확인 했다.

 

      어려움은 자꾸 따르며, 써 논 원고 뭉치도 분실해

      여러책을 발간치 못했다.

 

그 어려움 속에 단군시대에서부터, 마지막으로 백제의 멸망과

흥기까지를 기록하며 조선 상고사를 완성했던 것이다.

'생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운동 1. 이승만.  (0) 2024.04.03
나라의 운명  (0) 2024.03.29
치우 와 황제  (0) 2024.03.28
함경도 사투리  (0) 2023.09.26
왕오천축국전  (0) 2020.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