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열국지( 301∼400회)

제 388 화. 효산에서 위령제를 지내는가.

서 휴 2023. 12. 13. 15:41

 388 효산에서 위령제를 지내는가.

 

스스로 선봉장이 되어하수(河水)를 건넌 백리시(百里視)는 진()

영내를 계속 진격하여 왕관성(王官城)을 공략하여 함락시켜 버렸다.

 

       주공또 왕관성이 함락되었나이다.

       진군(秦軍)이 가는 곳마다 모두 점령하는구나

 

       진군(秦軍)을 물리쳐야 하지 않겠소

       어찌하면 좋은지 어서들 말해보시오

      

진군(秦軍)이 거침없이 계속 점령해 들어오자다급해졌다는 걸

알게 된 진양공(晉襄公) 대소 신료들을 모두 조당(朝堂)

모이게 하여, 진군(秦軍)을 물리칠 계책을 세우게 했다.

 

       주공신 조쇠(趙衰이옵니다.

       진군(秦軍)은 분노가 극에 달해 있으므로,

       온 국력을 다해 죽을 각오로 싸우고 있습니다.

 

       또한진목공(秦穆公)이 친정(親征) 하고 있어.

       우리가 직접 대적하면 더욱 불리해질 겁니다.

 

       주공, 잠시 진군(秦軍)이 하는 걸 지켜보다가

       적당한 기회를 보아,  늦긴 했으나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을 종식해야 하옵니다

       주공중군 원수 선차거(先且居이옵니다.

       진군(秦軍)은 세 번이나 치욕적으로 패했습니다.

 

       힘이 약한 미물(微物)도 궁지에 몰리면 사나워지는

       법인데하물며 진(나라야 오죽하겠습니까

 

       진군(秦軍)은 싸움에 패한 것을 치욕으로 여기고

       있으며 또한, 모두 용기를 갖춘 세 장수이므로

       싸움에서 이길 때까지 그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주공, 일단 전쟁을 벌이게 되면언제 싸움이

       끝날지 아무도 예측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주공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대 사마 조쇠(趙衰)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진양공(晉襄公)은 조당(朝堂)의 중론을 들어 사방의 성읍(城邑)에게

지키기만 할 뿐절대 진군(秦軍)과 대응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진군(秦軍)의 요여(繇余)는 싸움에 응하지 않고 굳게 지키기만

하는 진군(晉軍)의 태도를 보고 있다가 진목공(秦穆公)에게 말한다.

 

       주공()의 영토에 거리낌 없이 침공하여도

       겁을 먹은 진군(晉軍)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고

       아무리 싸움을 걸어도 응하지 않고 있나이다.

 

       주공(나라는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주공, 지난 전투에서 죽어간 우리 군사들의 시신이

       효산(崤山)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사옵니다.

 

       주공이번 기회에 효산(崤山)에 올라가시어

       군사들의 시신을 거두어 주시면 어떠실는지요

더는 진군(晉軍)과 싸울 수 없게 된 진목공(秦穆公)은 할 수 없이

요여(繇余)의 말에 쫓아즉시 진군(秦軍)을 이끌고 모진(茅津)에서

다시 하수(河水)를 건너, 동효산(東崤山)에 이르러 진채를 세웠다.

 

모진(茅津)은 지금의 하남성 삼문협시(三門峽市)의 대안(對岸)

있었던 고을로황하(黃河)를 건너던 나루터였다.

 

       진목공을 비롯한 진군은 하늘로 올라간다는

       상천제(上天梯)를 바라보기도 하고

 

       말이 떨어질 만큼 위험한 타마애(墮馬崖

       너무 높고 깊은 절명암(絶命巖)을 쳐다보며

 

       사람의 혼백도 흩어진다는 낙혼간(落魂澗),

       귀신도 근심에 쌓인다는 귀수굴(鬼愁窟)을 보았다.

 

진군(秦軍)은 우리가 어찌 저렇게 험한 곳을 지나갈 수 있었냐며,

감회가 깊어졌으며,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아연(俄然해하였다.

 

       모두 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죽어간 군사들의 시신을 거두어

       풀을 베어 관처럼 만들면서 모으도록 하라

 

       골짜기 중에 평평한 곳을 빨리 찾아라

       관들을 모두 그곳에 모아 매장하도록 하라

 

진군(秦軍)은 죽어간 군사들의 유골을 다 모아 매장하고 나자, 또

효산(崤山)에 제단을 준비하고 말을 잡아 희생으로 바치면서, 죽은

군사들의 혼령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진목공(秦穆公)은 소복으로

갈아입고, 손수 술잔을 바치면서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백리시(百里視)를 비롯한 모든 진군(秦軍)

       모두가 땅에 엎드려 통곡하면서 오랫동안

       일어설 줄 모르며 애통한 눈물을 흘리었다.

 

그동안 진군(晉軍)에게 점령당했던 왕()과 팽아(彭衙)의 백성들은

진군(秦軍)이 진(나라에 쳐들어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모두 용기를 내어 진()의 선차거(先且居)가 남겨두고

간 수장(守將)을 쫓아내고, 다시 진(나라에 복속했다.

 

진군(秦軍)은 개선가를 부르며 옹성(雍城)에 귀국했으며진목공은

백리시(里視)를 아경(亞卿)으로 임명하면서두 서장(庶長)

요여(繇余), 공손지(公孫枝)와 함께 국정을 다스리게 했다.

 

       서걸술(西乞術)과 건병(蹇丙)에게 상을 내리고

       중대부로 그의 관작을 올려주었다.

 

       또한 포진관(蒲津關) 이름을

       대경관(大慶關)으로 바꾸어 부르게 하였다

 

한편 서융주(西戎主)는 진군(秦軍)이 진군(晉軍)에게 세 번이나

패하자그는 진군(秦軍)이 허약하다고 판단하여여러 부족을

선동하여 진(나라로 쳐들어가기로 했다.

 

       서융주(西戎主)가 쳐들어올 것이라고 하오

       우리 진군(秦軍)이 개선하여 돌아온 이 여세를 몰아

       군사를 서쪽으로 돌려 서주(西戎)을 토벌하면 어떻겠소

 

       주공신 요여(繇余이옵니다.

       먼저 격문을 써서 보내고 난 후

       서융주(西戎主)의 태도를 보아가며

       군사를 일으켜도 늦지 않을 것이옵니다.

 

진목공(秦穆公)의 허락을 받은 요여(繇余)는 그동안 조공(朝貢) 

바치지 않은 서융주(西戎主)를 꾸짖으며당장 조공(朝貢) 보내지

않으면 군사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겠다는 격문을 써서 보냈다.

 

그때 서융주(西戎主)는 옛날과 달리 진군(秦軍)이 진군(晉軍) 

싸워 개선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는 즉시 서쪽 융족(戎族) 24여 개 부족장을

       이끌고 옹성(雍城) 들어왔으며조공을 올린 후에

       진목공을 서방의 방백(方伯)으로 받들기로 맹세했다.

 

이에 대해 진목공은 대장 백리시의 능력을 믿고 여러 번의 패전에도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기에 백업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에 한 사관이 진목공에 관하여 논하기를

       천군의 병사는 얻기 쉬어도 한 사람의 장수는

       구하기 어렵다라는 말을 실천한 것이라 했다.

 

이 일로 진(나라의 국위는 주() 왕실에까지 전해졌으며, 이에

주양왕(周襄王)이 윤무공(尹武公)에게 말했다.

 

       ()과 진()은 그 국세가 비슷한 나라이다.

       두 나라는 선대에 왕실에 공을 세운 바가 크도다.

 

       옛날에 진()의 중이(重耳)가 회맹을 주재할 때

       짐이 왕명으로써 후백(侯伯)에 임명했었노라

 

       오늘 임호(任好)가 다스리는 진(나라의 국세가

       (나라에 뒤떨어지지 않으니

 

       역시 임호(任好)를 진()과 같은 후백(侯伯으로

       임명하고자 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왕이시여()은 스스로 후백(侯伯)이 되었지만

       아직 진()은 우리 왕실을 받들지 않고 있나이다.

 

       오늘날 진()과 진()이 사이가 서로 나빠져 있는데

       진양공(晉襄公)은 부친의 뒤를 이어 후백의 역할에

       아무런 잘못이 없으며또한 잘 이행하고 있사옵니다.

 

       이런 판에 만약 왕실에서 진()의 임호(任好)

       후백(侯伯)에 봉한다면 진()은 몹시 싫어할 것입니다.

 

       후백(侯伯)으로 임명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서융의 백주(伯主)가 되었음을

       축하한다는 국서를 써서 보내시옵소서

 

       그리되면 임호(任好) 감사하는 마음을 표할 것이고

       진후(晉侯또한 우리를 원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허허윤무공(尹武公)의 말이 옳도다

 

진군(秦軍)이 효산(崤山)에서 진군(晉軍)의 매복에 걸려 전멸한 해는

진목공 33년인 기원전 627년이었으며, 진군(秦軍) 황하를 건너

()의 영토를 유린(蹂躪)하고다시 황하를 건너 효산(崤山)에서

진군(秦軍)의 위령제를 지낸 해는 3년 후인 기원전 624년이다.

 

       주양왕(周襄王)은 윤무공(尹武公)을 사자로 보내 서융(西戎)

       복속시킨 업적을 축하하며 금으로 만든 북을 하사했다.

 

진목공은 이때부터 중원(中原)의 패권을 쥐게 된다그러나 나이가

많은 탓으로 주양왕(周襄王)이 하사하는 금북(金鼓)을 직접 받으러

가지 못하고대신 공손지(公孫枝)를 보내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어찌 나보다 먼저 요여(繇余)가 죽는단 말이냐

       정말 애통하여 참을 수가 없구나!

 

갑자기 요여(繇余)가 병으로 죽자, 몹시 애통해하던 진목공은

백리시를 우서장(右庶長)에 명하여 요여(繇余)를 대신하게 했다.

 

       주 왕실에 다녀온 사이에 요여(繇余)의 자리에 

       백리시(百里視)가 임명된 것을 본 공손지(公孫枝)

       몹시 실망하였다.

 

순서대로라면 우서장(右庶長) 자리에 공손지(公孫枝))가 올라야

했으나, 진목공은 백리시를 더 신임한 것으로 보였다.

 

공손지(公孫枝)는 스스로 늙었다는 걸 인정하며 가슴이 허전했으나,

조용히 은퇴를 생각하며 정계에서 물러났다.

 

       이후 진() 나라는 평온이 찾아왔다. 

       이처럼 진(나라가 조용해지자진목공 곁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갔다.

 

 389 퉁소 소리로 봉황을 부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