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이야기

아리랑의 뿌리

서 휴 2019. 12. 18. 18:47

아리랑의 뿌리 1.

서 휴

 

      아리 랑 아리 랑 아라 리오.

      아리 라 아리 라 아리 라오.

      오리강 오리강 오리 강이라오.

 

옛날 우리 조상님 들은 물에 사는 오리(鴨)아리 라 부르고

흐르는 강(江) 라고 하며, 들판을 라 불렀다.

 

산(山)라 부르며 소나무(松)아사 라 불렀기에

소나무가 많은 산(山)이라 해서 아사달이라는 산(山) 이름이

생겨나고, 대동강을 펴라라 부르며 있는 들이 평양이 됐다.

 

       우거진 숲을 가리 라 부르고,

       숲속을 흐르는 강을 가리 라 라고 불렀으며,

       물이 많은 늪지대를 가라라 불렀다.

 

가라나라는 한문으로 가락국이라 쓰여 지며

질펀한 들판을 가야라고해 가야나라 즉  가야이 되었다.

 

       한글이 없던 시절이라 한자의 음으로

       표시하다 보니 우리말이 많이 변형되었다.

 

몽골들의 말에도 우리의 압록강아리 나레라 하고

한강아리라 불렀르므로, 한강 물은  아리에 

물 수(水)가 붙어 아리수가 되었다.

 

할라는 저 멀리 구름 위에 우뚝 솟아있는 검푸른 으로

할라에 뫼 산(山)이 붙어라 산이 되며 한라산으로 쓰인다.

 

       아라(我)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신(神)을 가리킨다

       아라 한은 큰 사람이라고 하니 우두머리일 것이다

 

오리인 아리는 물이 퍼져있는 곳에 많이 모여 사니

그곳엔 아리먹거리가 많았을 것이다.

 

아리가 많이 모여드는 곳은 물이 많는 강이나

강과 바다가 만나는 하구일 것이며

이러한 곳은 사람도 먹을 것이 많았을 것이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세계 어느 곳이나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모두 강에서 시작된다.

 

     아리랑은 살기 좋았던 우리의 옛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아닐까.

     아리라가 변해 아리랑이 된 건 아닐까.

 

아리랑에 대한 해석은 많기도 하지만 우리 민족이 아주 옛날부터

살아오며, 오랜 세월 동안 마음속 깊이 새겨지면서, 그리워하는

마음이 묻히어 쌓이게 되면서,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려는

개척정신이 담겨 있다가 아리랑으로 솟아난 것이 아닐까.


       어느 사전에서도 나오지 않는 대부분의 우리 옛말들이

       조선 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많이 보인다.

 

조선 상고사(朝鮮上古史)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이

지으시고 박기봉(朴琪鳳)이 이해하기 쉽도록 펴낸 책이다.

 

       단 신채호 선생은 짧은 세월 동안 너무 많은 활동을

       하면서도 우리 상고 역사서인물 역사서를 많이 쓴바

       우리 역사상 천재적인 사학자(史學者)라 부를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은 우리의 상고사를 정립시키고자 국내는 물론이며

옛 고구려 벌판과 요하 지역과 연해주와 북경과 남경으로

상하이까지 다니며 우리 역사의 흘러간 실상을 보며 탄식을 한다.

 

      송도를 지나면서 만월대를 쳐다보라.

      반쪽짜리 기와인들 남아있더냐.

      초석 돌 하나가 남아있더냐.

 

      넓은 밭에 이름만

      만월대라 할 뿐 아니더냐.

 

      . 슬프다.

      만월대는 이조(李朝)의 부항(父行)으로

      멀지 않은 고려조(高麗朝)의 궁궐인데

 

      무슨 병화에 탔다는 전설도 없는데

      어찌 이같이 무정한 유허(遺墟)만 남았느냐.

 

      이와 같은 예로써

      부여에서 백제의 유물을 찾을 수 없고

 

      평양에서 고려의 구형(舊形)

      볼 수 없는 실정이구나.

 

단재 신채호 선생은 1145년경의 고려(高麗) 인종왕(仁宗王)

김부식(金富軾)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에서  넓은 대륙에 살았던 

우리 고구려 신라 백제 인들이 넓은 대륙에 살았으나

 

       그때의 우리 땅 이름을 압록강 아래인 한반도 안으로

       끌어내려 우리의 넓은 땅을 잃어버리게 하였으며,

 

일본이 아주 편협(偏狹)생각으로 우리역사를 왜곡시키는데

맨먼저 앞장섰다는 인물이라며 김부식을 아주 미워했다.

 

       조선 상고사를 읽다 보면  고려사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이 얼마나 왜곡이 심한가를 알게 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우리 상고사를 바로잡으려 사료를 찾아 헐벗고

굶주리는 고난을 스스로 택하였다.

 

      편히 살수도 있으련만 많이도 굶어가며

      돈이 없어 주요한 책을 빌려 겨우 읽어가며

 

      광개토대왕비의 탁본을 사지 못하여

      잠시 읽고 직접 찾아가 더듬어가며

 

      써 논 원고 뭉치도 분실해가며 어렵게

      우리 조선 상고사를 완성하신 분이며

 

      단군시대에서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기까지를 기록하였다

.

 

아리랑의 뿌리 2.

서 휴

 

우리나라 일부 조상들은 새로운 정권이 지나간 정권을 욕하며

지나간 정권의 올바름을 부정하고 귀중한 자료들조차 불태우거나

없애가면서 자기를 미화시키는 내용의 책을 만들어 내어

우리 역사를 크게 왜곡시키는 데 앞장을 섰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중국은 인구가 많다 보니,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여러 기록이 튀어나오므로,

       서로 비교하며 바른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으나,

       아쉽게도 우리는 그런 일이 매우 드물다.

 

전란(戰亂) 중이거나 어려울 때는 많은 사료가 불에 타고 빼앗기고

헐값에 팔려나가면서 중국과 일본은 귀중한 우리의 사료(史料)들을

가지고 우리 역사를 축소하거나 왜곡시켜가며 자기들의 역사로

바꾸어 놓았으며 또한 귀중한 우리 사료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사료가 부족하다 보니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들의 왜곡된 역사를 배우게 되니

      정말로 통탄한다. 신채호선생은

 

      민족의 뿌리를 찾아 평생을 보내신

      분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가 있겠다.


신채호 선생은 1880(고종 17)에 충남 대덕군 정생면 익동

도리산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똑똑한 신동으로 소문났으며

 

19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26세인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자

장지연(張志淵)의 추천으로 황성신문에 논설 기자로 입사한다.

 

       19051117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이뤄지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장지연의

       피맺힌 사설로 황성신문은 강제 폐간 당하고 만다.

 

1906년 영국인 (Ernest Thomas Bethell) 배설(裵說)이 운영하는

대한매일신보에 영입되며 27세에 주필이 되었다.

 

그의 논설은 애국심에 넘치며 신랄하면서도 패기차고 정의로운

필치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그 당시 영향력이

큰 애국계몽 운동가로 부상하였다.

 

       1907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 발간하였으며

       1908년에 을지문덕 젼리슌신 젼을 연재하면서

       우리의 근대민족주의 사학을 정립시키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연재하였다.

 

       1909년에는 최영崔瑩장군인 동국거걸 최도통전

       (東國巨傑 崔都統傳)을 연재하였다.

 

       1910년 망명하여 중국 청도(靑島)회의를 개최하며

       1911년 권업(勸業) 회를 조직하여 권업신문 주필이 되고

       1912년 만주에서 광복회(光復會)에 들어가 활동하며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하는 데 참여하였다.

 

       1914년 동창학교. 백산학교. 대흥학교. 대종학원

       (大倧學園)을 운영하는 윤세복(尹世復)의 권유로

       서간도의 동창학교에서 역사 선생으로 지내며

 

고구려 환도성의 유적과 광개토대왕릉 등의 방대한 고분군들을

줄기차게 열심히 답사하여 조선사(朝鮮史) 등을 집필하며 아쉬운

탄식을 남긴다.

 

       내가 러시아령 방면과 만주방면에 있으면서 우리의 사적

       찾기에 전력을 다하였는데 여간 많은 것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우리의 자랑 되는 훌륭한 것이 많았는데

       저 무지한 중국인의 손에서 자꾸 없어져 가는 것을 보면

       통곡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하였다.

 

1915년 약 4년간을 북경대학北京大学 도서관에서 살다 십이 하며

조선사朝鮮史를 발간하였으나 지금까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또 한 중화보中華報와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그의 사설이 실리면

신랄하면서도 패기에 차고 정의로운 논조로써 많은 인기를 끌며

신문 부수가 일시에 45천부가 늘어나니 많은 원고료를 받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었으나

 

      그의 칼칼한 성격대로 글자 하나가 빠지거나

      틀리게 실리면 청탁을 거절하며 타협이 없었다.

 

1914년에 일어난 1차 세계대전19181111일에 끝나자

191812월에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발표하자

그 당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전 세계의 수많은 약소민족에게

커다란 희망과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191928일 일본 도교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조선의 독립선언문을 발표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국외에 있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일본이 강압적으로 범 일본주의를

아주(亞細亞洲)에 펼치는 것은 동양의 이 된다고 밝히며 우리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는 39명이 서명하여 무오독립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국민의 본령(本領)은 독립이며 사람은 한 번은

      죽는 것이니 목숨을 아끼지 말고 육탄혈전(肉彈血戰)으로

      독립을 완수하자는 내용이었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19194월 상해에서 임시정부

수립하는 발기 회의에 30명이 모여 우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의결하며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승만은 국내외 기독교 세력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미국의 박사학위가 명성을 높여주었고 하와이에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인지도가 더욱 높아져 있었던 때이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서'문제가 떠오른 것이다.

 

3.1운동 소식이 전해지기 전인 191933일 이승만은 미 국무부에

우리나라를 당분간 국제연맹의위임통치아래 둘 것을 제안하는

내용의 위임통치 청원서를 낸 바 있었다.

 

       이에 19194신채호.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아직 나라를 찾기도 전에

       팔아먹었다. 라고 거세게 비판하였다.

 

19197월 제5회 전원위원회에서 신채호는 위원장을 맡았으나

초기부터 이승만의 외교 노선에 반대하면서 위임통치안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주장하다가 관철되지 않자 사퇴하였다.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19199월 개헌이 단행됐고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임시정부의 추대를 받자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임시정부의 명칭을

'Republic of Korea' 하였고 자신의 대외호칭을 대통령

(President)으로 정하여 각 나라에 통보하기도 하였다.

 

       신채호는 이승만의 대통령 선출을 강경히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191910월 임시정부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임시정부의 외교론과 준비론을 비판하고 무력투쟁을

       전제로 한 실천적 독립운동을 주창하였다.

 

신채호는 이승만 대통령 선출에 반대하는 신규식(申圭植) 남형우

(南亨祐) 40명의 동지와 신대한동맹단(新大韓同盟團)을 조직하고

주간 신문인 신대한(新大韓)창간하며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신대한(新大韓) 지를 발간하며 주필이 되었으나

       일제의 방해와 재정 사정으로 휴간이 되자

 

       1920년 박용만 등 50여 명의 동지와 함께 2

       보합단(普合團)조직하고 내임장(內任長)에 선출되었다.

 

19209월에는 박용만 신숙(申肅) 등과 함께 여러 단체를 통합하여

효율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군사통일촉성회발기하였으나.

하지만 일제의 강력한 만주토벌 정책에 막혀 당시 독립군 활동은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19211월 김창숙과 함께 시사 논설과 한국사론을

       다루는 독립운동 한문 잡지 천고(天鼓)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1년간 상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미국에서만 활동하므로 써 많은 반발을 샀다.

 

       1920년 처음 상해에 나타났으나 각료들과의 갈등이

       계속되자, 19215월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로 떠났다.

 

19214월 이승만이 상해(上海)에 머물면서도 위임통치청원사실에

관한 사과와 해명이 없자, 54명 동지의 서명을 받아 이승만의 불신임과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는 최후통첩을 보내며

 

이후 상해 임시정부와 완전히 결별하고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여

나아가기 시작하며 박용만 신숙 등 동지들과 함께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를 개최하였다.

 

       19215월 군사통일주비회의 국민대표회의 결성을

       위하여 김정묵(金正默) 박봉래(朴鳳來)와 함께

       통일책진회(統一策進會)를 발기하였다.

 

192243세에 만주 생활이 극도로 궁핍하여져 북경北京의 관음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관음사에서 대저작물인 1.조선사 총론

2. 문화편 3. 사상변천편. 4. 강역고. 5. 인물고를 지었으나

현재까지 전하여지지 않고 있다.

 

       1922년 이회영과 유자명. 중국인 이석증 교수와

       교류하며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사상을 갖게 된다.

 

19231월 무정부주의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의열단장 김원봉

부탁으로 의열단(義烈團)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문(朝鮮革命宣言文)을 완성하여주었다.

 

의열단義烈團191911월 만주에서 김원봉金元鳳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자 13명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로서 암살 파괴 폭동 등

폭력을 채택하고 독립활동을 하는 단체였다.

 

19231월 여운형 안창호 등의 호응을 받아 상하이에서 70

독립운동단체 대표들이 모여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며

김규식金奎植을 행정 수반으로 선출하였다.

 

19243월 뜻대로 되는 일이 없던 신채호는 정신적 좌절에 빠지며

궁핍하기도 하여 45세에 북경으로 돌아와 관음사觀音寺에 들어갔으며

 

승려 생활 중에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를 집필하기 시작하며

1925년 말까지 중국의 문헌들을 조사하면서 본격적인 국사 연구를

계속하면서 역사.비아非我투쟁기록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말로 우리 민족사관의 이론을 세웠고 총론이 완성된

조선사朝鮮史 (朝鮮上古史)5년 후인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하게 된다.

 

192410월부터 19253월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논문은

1929년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草로 묶어져 간행되었다.

 

      무정부주의 無政府主義 작품으로는

      대흑호大黑虎의 일석담一夕談

      과 용의 대격전. 등을 썼다.

 

무정부주의는 모든 정치적인 조직이나 규율,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가장 높은 가치로 내세우는 사상으로 프루동, 바쿠닌,

크로포트킨 등이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1926년부터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로서 활동하기 시작하는 그때에는

왕정에 대한 폐단을 인식하여 무정부주의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었다.

 

     무정부주의 無政府主義에서의 국가란. 좋은 말과 뜻으로 들리나

     지배층이 민중을 수탈하기 위한 기구로 공산주의共産主義로 해석된다.

 

1917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는 전사자 170만 명과

부상자가 500만 명에 이르렀고 경제적 어려움 또한 극심하여

전쟁을 중단하자는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이 커다란 호응을 얻게 되며

 

     군인과 노동자와 민중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켜

     192011볼셰비키적군赤軍이 승리하자

 

19221230일 러시아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함께 뭉쳐지며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을 결성하게 되어

소련 蘇聯이라는 거대한 공산주의국가가 생겨나게 된다.

 

이에 따라 우리의 애국자 愛國者들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인

공산진영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 자유진영으로 나누어지며

 

결국. 무정부주의 자인 공산진영과 자유주의 자인 민주진영으로

나뉘게 되어 치열한 대립과 갈등을 지속하게 된다.

 

19276개국 민족 대표 120여 명이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을

조직하려 하자 신채호선생은 대만인 린빙원林炳文과 이필현李弼鉉

함께 조선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7년 신간회新幹會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8년 한국인을 중심으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의 북경회의를 개최하고

선전기관을 설립할 것과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한 폭탄 제조소설치를 결의한다.

 

19285월 신채호등은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위조화폐를 가지러

타이완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기륭항에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송치되며

 

7개월간의 조사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모든 수단은 비록 도적질이라 해도 모두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함께 체포된 대만인 린빙원은 일제의 혹독한 고문으로

조사 중인 19288월에 옥사하고 만다.

 

1930428일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여순旅順 형무소의 독방에 수감 되었다.

 

어려서부터 병약한 신채호에게는 고문의 후류증과 여순旅順 형무소의

혹독한 추위와 차가운 시멘트 바닥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1935년 건강이 매우 악화하자 형무소에서 보증인이 있으면 출소시키겠다.

하였으나 보증인이 불행이도 친일파라며 가석방假釋放을 거절한다.

 

옥중에서 죽게 될 것을 예감하며홍명희洪命憙에게 편지를 보내

대가야천국고大伽倻遷國考정인홍약전鄭仁弘略傳 등 구상된 원고가

죽음으로 완성하지 못할 것을 애석해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출옥을 18개월 앞둔 1936218일 뇌일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전보를 받고 서울에서 부인 박자혜와 아들 수범이 여순 형무소에 도착하였을

때는 의식불명이 되어 차가운 시멘트 바닥의 거적 위에 누워 있었다.

 

임종을 지켜보겠다며 애원하였으나

일본인 간수 들은 면회시간이 지나자 가족들을 쫓아냈다.

 

1936221일 오후 420분 얼어붙은 시멘트 바닥 위에서

향년 57세의 생을 마감하니 힘없는 민족으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으며 우리는 우리의 천재 사학자를 잃게 되고 만다.

 

193211월 당시 김구가 이끌던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는

19253월 임시의정원이 탄핵시킨 이승만을 불러 국제연맹

우리나라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하였다.

 

19331월 영어가 능통한 이승만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우리가 중립국

되어야한다고 탄원을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승만은 1941년 일본이 태평양의 여러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이나

미국을 침략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내용의 <일본 내막기>를 출간하였다.

 

출간 당시에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으나 일본의 진주만 기습 이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으로 이승만의 이름은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일본과 중국과 국내에도 널리 알려지게 된다.

 

조선 왕조의 폐해와 대한제국의 무기력에서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우리 애국세력의 일부는 중국中國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에 대항하는

공산당에 협력하여 공산주의자가 되고 말며 일부는

자유민주주의를 일으키려는 민주 진영이 되어 대한민국건립에 힘쓰게 된다.

 

1945815일 우리는 광복을 찾았으나 상해임시정부 때부터

둘로 쪼개어진 우리는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남북으로 분단되고 만다.

 

2차 세계 대전 후 국제 평화와 안전의 유지와 국제 협력 달성을

위하여 창설된 국제평화기구인 국제 연합(UN)에게 이승만

원래 우리 땅인 대마도는 당연히 일본에게서 돌려받아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며 일본은 임진왜란 때부터 끼친 피해를 보상하여야한다며

 

국제 연합(UN)을 통하여 대일 청구권 문제를 강력하게 주장하던 때에

6.25 동란이 일어나 안타깝게 중지되고 만다.

 

무정부주의자의 일부가 소련蘇聯을 등에 업은 김일성과 합세하며

애통하게도 민족의 엄청난 비극인 6. 25동란을 일으키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가 일본에 대한 강제수단을 놓치게 되니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독도獨島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우리는 하루빨리 갈등의 시기에서 벗어나 나라를 좋은 방향으로

바로 세워야하나 서로 화합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에 놓여있다.

 

      우리의 상고사는 언제까지일까.

      많은 학자의 주장과 발간된 책들을 조금 살펴보자.

 

오리자를 쓰는 압록강鴨綠江은 명당봉 明堂峰(1,800m)에서

흘러나온 물이 백두산 장군봉(2,750m)의 물과 합쳐지고

 

넓은 개마고원에서 높은 산들의 많은 물과 또 합쳐지며

수량이 풍부해진 압록강이 되어 서해로 흘러든다.

 

압록강에 많은 물이 모이며 넓게 흐르다 보니 그 유역이 넓기도 하여

많은 아리(오리)와 많은 사람이 곳곳에 모여 살았을 것이다.

 

      이 같은 환경은 우리의 넓은 바다였던

      발해만 渤海灣에서 더욱 찾을 수가 있겠다.

 

      우리의 대조영이 세운 발해渤海 나라가 발해만을

      중심으로 서해와 동해를 장악하여 무역선을 관장하였기에

      지금도 발해만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발해渤海는 고구려 땅인 요하지역을 다 찾았으며 고구려보다 더 넓혀

연해주인 불라드보스톡나훗카 까지 차지하는 실로 방대한 나라였다.

 

발해만渤海灣은 북동에서 남서까지 480km이며 동서로 306km에 이르며

요동반도遼東半島산동반도山東半島가 마주보는 만의 바다이다.

 

      발해만에는 황하.요하.요수.난하 등이 흘러들어오니 양 사방으로

      넓고 풍부한 하구가 만들어졌으며 넓은 평야 지대에는

      숲이 울창하였으므로 발해만 유역 일대에 많은 사람이

      모여 살기가 더욱 좋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발해만 渤海灣을 중심으로 황하의 중원中原 지역인 요서遼西

만주벌판의 요동遼東을 포함하며 북쪽으로 내몽고 초원지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서 많은 유적과 많은 유물이 발견되어

 

과학적으로 조사한 결과 고조선古朝鮮 앞에 광범위하게 발달한

우리의 문명인 요하문명遼河文明이 있었다는 것을 일본과 중국학자들도

인정하는데 중국은 자기의 중화문명 中華文明의 뿌리로 삼으려 한다.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1500년까지인 우리의 요하문명遼河文明

널리 퍼져나가 1천 년 뒤에 황하문명黃河文明이 일어나게 된다.

 

    세계의 4대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

***인도 인더스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중국 황하 유역의 *** 황하문명이라고 교과서에 실려 가르치고 있으나

 

사실은 황하문명보다 1천 년이나 앞선 우리의 요하문명이 엄연히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니 하루속히 올바르게 가르쳐야 할 것이다.

 

오늘날까지 우리의 많은 학자가 조사한 바로는 우리 교과서 한국사에서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의 위치가 대동강의 평양으로 되어있으나

 

조선 성종 때 문신인 최부崔溥가 저술한 표해록漂海錄과 똑같이

요령遼寧성의 요양遼陽 일대가 고구려高句麗평양성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며 요하 옆이며 아사달 산이 있는 하얼빈

평양성이었다고 단재 신채호 선생도 증명하였다.

 

      인하대학교의 고고학자 복기대卜箕大 교수는

      요하지역홍산문화의 이해라는 책을 펴내며

 

또한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성과 촌의 수가 총 64성과 1400촌을

점령한 것으로 교과서에 실려 있으나 광개토대왕비를

정밀 분석하니 총 128성과 2400촌이라고 증명하며

 

나라와 고조선古朝鮮의 경계와 한사군漢四郡철령鐵嶺

평양平壤의 위치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을 몽매하게 만들려 한반도 내에서만

      이뤄진 역사인 것으로 왜곡시키고 조작한

      우리의 고대사를 지금도 우리의 학생들이 배우고 있다.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삼한三韓 고구려高句麗 발해渤海 고려高麗

역사를 다루고 있는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인류 창세기 역사와

한민족 9천 년사의 우리나라 계보系譜를 바로 세웠다는 책으로

 

계연수桂延壽(1864~1920 일경에 살해됨) 선생이 내려오던 문서를

편역하였으며 이유립李裕岦1979년에 출간하였고

 

이를 이어받아 종교가며 역주자인 안경전安耕田이 지난 30여 년 동안의

현지답사와 문헌과 고증으로 우리의 뿌리를 밝혀내는 완역본을 만들어

새롭게 환단고기桓檀古記를 발간하여 내놓았다.

 

역사학자 모두 다 같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찾기

위하여서는 현재의 일제 식민사학과 중화사관을 송두리째

허물어뜨리며 올바른 우리 상고사를 정립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아리랑은 어떠한가.

       아리랑의 뿌리는 어디일까.

       아리랑의 뿌리는 찾을 수가 있을까.

 

아리랑의 뜻이 무언지. 왜 생겨났으며 언제부터 불러왔는지

밝혀줄 자료가 없다. 그저 이럴 것이다. 하는 짐작뿐이다

그러나 나는 조선상고사를 읽으며 아래와 같은 해석을 하여 본다.

 

      아리 랑 아리 랑 아라 리오.

      아리 라 아리 라 아리 라오.

      오리 강 오리 강 오리 강이라오.

 

아리랑상고시대에 우리민족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옛 고향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이었으리라는 생각으로 추정하게 된다.

한 맺힌 아리랑. 영화를 따라가 보자.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

19373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안타깝게 운명한

춘사春史 라운규羅雲奎

 

191918살에 3.1운동 만세를 불렀으며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가담하다가

 

192120살에 일본이 백두산과 개마고원과 두만강 너머의 우리의 온갖

자원을 빼앗으려 청회선 철도를 놓는 공사에 우리 민족의 불쌍한 노동력을

혹독하게 착취하는 걸 보며 이를 저지하고자

 

함경북도 청진淸津과 회령會寧 간의 청회선터널을 폭파하려다

목전에 발각되어 청진교도소에서 18개월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192322살에 단성사의 조선키네마영화사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조역인 가마꾼도 하다가 농중조籠中鳥라는 영화에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농중조는1926년에 제작된 흑백 35mm 필름의 무성영화로

감독은 이규설李圭卨이며 주연은 이규설 복혜숙 나운규 등이었다.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시대에 자유연애론을 주장한 영화로써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며 나운규의 이름도 알려진다.

 

192625살의 나운규는 본인이 각본을 쓰고 주연이며 총감독으로

무성영화인 아리랑을 만들면서 비판적 사실주의 영화예술의

첫 개척자로 영화사에 길이 이름을 올리게 된다.

 

1926101일 단성사團成社에서 처음 개봉한

무성영화 아리랑은 초유의 예술성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삼엄한 일본 강점기에 죽음을 각오하는 듯 항일 민족정신을

불러일으키는 혁명적인 영화를 만들어 상영한 것이다.

 

무성영화無聲映畵인 아리랑이 상영될 때에는

극을 해설하며 분위기를 돋우는 변사辯士가 있었다.

      (원래의 대사를 따라가 보자)

 

      최 노인은 아들인 영진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논밭을 팔아 대학을 보내었는데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다 일본 순사에 붙들려

      고문 끝에 미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었다.

 

      오기호는 악덕 지주 천가千哥의 머슴이며

     일본 순사의 앞잡이이기도 하였던 것이었다.

 

온 마을 사람이 미워하는 오기호를 미친 영진은 낫을 휘둘러

쫓아가고 일본 순사에도 찌를 듯이 낫을 휘두르는 것이었다.

 

      노인님, 영진이가 또 오기호를 못살게 굴었습니다.

      지주 나리는 당장 집에다 가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땅을 떼고

      이 마을에서 내쫓겠다고 합니다.

 

      지주 천가千哥의 하인들이 돌아가자

      최 노인은 영진의 가슴을 쥐어흔든다.

 

      영진아. 이놈아.

      이 아비의 마음을 그만큼 태웠으면

      이젠 정신을 좀 차리려무나.

 

아들을 공부시키자고 논밭을 팔아버리고 지주네 땅을 부치며

아득바득 애를 쓰고 겨우 살고 있는 터에 기둥처럼 믿던 아들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아버지의 마음은 얼마나 안타까우랴.

 

그러나 아버지의 그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영진은 아리랑을 즐겁게 부를 뿐이었다.

 

미친 영진 이는 여동생인 영희를 아끼며

영희 또한 미친 오빠를 지켜주고 있었었다.

 

      영진이. 날쌔.

      서울의 대학동창생 윤현구 일새

 

      어 허. 그런가.

      오라버니. 옛날 친구 현구 오빠예요.

      어 허허. 너는 누구인가.

 

      죄송해요. 현구 오라버니.

      괜찮아. 영희가 고생이 많겠구나.

 

      어찌하면 좋으냐.

      영진이가 제정신이 들어와야 할 터인데

      현구 오빠. 미안해요.

 

악덕 지주 천가千哥는 영진을 못살게 굴 뿐만 아니라

누이동생 영희를 첩으로 삼고자 탐을 내며

 

오기호는 천가에 앞장서서 영희를 천가에게 시집보내라며

영진의 아버지까지 괴롭히었던 것이었다.

 

오기호는 어느 날 영희만 있는 집안에 들어와 영희를 겁탈하려

억누르는데 영희를 사랑하는 영진의 친구 현구가 우연히

찾아왔다가 오기호와 격투를 벌이었다.

 

영진이는 이 싸움을 흥겨운 춤으로 보여 낫으로 깨어진 양푼을

두드리며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박수 치는 것이었다.

 

흥겨워하며 춤을 추던 영진은

친구 현구가 오기호에게 맥을 못 추며 얻어맞기만 하자

영진은 갑자기 다가가 오기호를 낫으로 힘껏 내리치고 마는 것이었다.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동리 사람들이

달려왔을 때는 오기호가 죽어 있었었다.

 

영진은 그 순간 본정신으로 돌아오게 되며

일본 순사가 달려와 영진의 몸을 묶는다.

 

      너는 살인자니. 가자

      . 제가 사람을 죽이었어요.

 

      동리 사람 여러분. 나는 한동안 죽었던 몸으로

      이제야 다시 살아났습니다.

      여러분은 웃음으로 나를 보내어 주십시오.

 

      여러분이 우시는 걸 보면

      나는 참으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 몸이 이 강산 삼천리에 태어났기

      때문에 미쳤으며 사람을 죽이었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내가 일상 불렀다는 그 노래를

      부르며 나를 보내어 주십시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는 님은

십리도 못 가고 발병 나네

 

청천 하날 엔 별도 많코

우리네 살림 사린 말도 만타

 

산천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문전의 옥답은 다 어데 두고

쪽박의 신세가 웬일이냐

 

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온다네.

이강산 삼천리에 풍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의 노래가 울리면서

      영진이는 묶이어 천천히 고갯마루를 넘어가고

      고갯마루에는 황혼이 깃들면서 자막은 내려간다.

 

라운규가 직접 아리랑 노래 가사를 짓고

바이올린 연주자인 김영환金永煥(1898-1936)

작곡하여 10여 명과 함께 단성사 무대에 올라가

무성영화를 뒷받침하는 음악을 반주하고

 

그 당시 이름난 여성 가수인 유경이劉慶伊와 연극배우인

김연실과 이정숙이 차례대로 번갈아 가며 직접 일어서서

직접육성으로 애잔하게 부르는 아리랑이 울려 퍼지자

모두가 일어나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한다.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였다 한다.

      나라를 빼앗긴 설움이 통곡이었다 한다.

 

      온 나라 곳곳이 통곡하였다 한다.

      아리랑이 온 나라를 통곡시켰다 한다.

      나라를 찾으려는 통곡이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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