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를 찾아

길상사를 찾아17.사랑의 모습

서 휴 2013. 7. 2. 19:01

길상사 吉祥寺를 찾아

서길수

 

17. 사랑의 모습

 

 

오늘 같이 무더운 날

지금의 함흥咸興 땅인 반룡산盤龍山의 치마대馳馬臺에서

힘차게 말을 달려 운성리雲城里正西方을 지나

용암리龍岩里 언덕에 있는 격구정擊毬亭에서 쉬지 않고

 

호련천瑚璉川 영대營岱 다리를 건너와

땀을 흘리며 우물가에 한바가지를 부탁하니

빨래하던 어여쁜 처녀가 버드나무 이파리를 띄워서 준다.

 

후후 불며 맛있게 마시고 난후 연유緣由를 물으니

갈증渴症이 심할 때 물을 빨리 마시어 체할까 걱정이 되었단다.

 

감동感動 받은 청년은 청혼請婚하여 부부夫婦가 되었다.

이 청년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태조太祖가 되시는 이성계李成桂라 한다.

 

그 당시當時에 우리나라 사람이 나라를 배신背信하여

우리나라의 땅을 나라에 바치고 그 지역 관활권 管轄權을 얻어

약100연간을 배신자背信者가 세습을 해가며 까지 다스리던

함경도의 쌍성총관부와 평안도의 동녕부가 있었다.

 

이성계가 말을 타고 달리던 함경도咸鏡道 땅의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

고려高麗의 공민왕恭愍王 5년 1356년에

 

이성계李成桂와 그의 부친 이자춘이 雙城摠管府를 없애는 전투에 참여하여

함경도咸鏡道 지역을 다시 고려高麗의 땅으로 회복시킨다.

이자춘李子春은 함경도咸鏡道의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 兵馬使가 되었다

 

이성계李成桂는 이때부터 철저히 공민왕恭愍王에게 충성忠誠하고 도우며

1361년 10만대군의 홍건적紅巾賊이 쳐들어와

공민왕恭愍王이 경북안동까지 피난가게 되자 선봉에 서서 나라를 구하고

 

여러 건의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면서 恭愍王을 지키며

또한 바닷가의 빈번한 왜구의 침략을 격퇴시켜 나라의 안정을 가져온다.

 

1370년에는 요동에 있는 원나라 동녕부東寧府를 쳐들어가 

지금의 평안도平安道 지역의 東寧府를 없애며

고려高麗의 땅은 백두산을 포함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의 경계를 회복한다.

 

공민왕恭愍王은 10년간을 원나라에 인질人質로 잡혀 있다가

노국공주魯國公主와 혼인婚姻하여 돌아와

 

의 년호年號 사용을 금지禁止하면서 

두발 의복 관습 제도를 고쳐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국토를 회복하면서 나라를 부흥復興시키고자 노력하며

완전한 독립 국가로써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

 

노국공주魯國公主가 죽고 난후에 공민왕恭愍王의 흐트러진 모습이 있었으나

이성계李成桂가 조선朝鮮을 개국하고 공민왕恭愍王의 사당을 세운 것은

 

허약한 국력을 다시 세우고자 노력한 공민왕恭愍王을 존경하면서

오랜 기간 자기를 믿고 힘을 합쳐준 은혜를 보답하며

恭愍王의 나라를 위하는 자세를 배우며 알리고자 함이었으리라

 

恭愍王의 북진정책北進政策을 조선朝鮮의 태조太祖와 세종世宗이 이어받아

지금의 길림성吉林省에 있던 강력한 여진족女眞族의 침범을 몰아내고

두만강 豆滿江 하류 남안南岸의 요충지要衝地인 여섯 곳에 진을 설치한 것을

 

육진정책六鎭政策이라 말하는데

이로써 평안도의 4군과 더불어 압록강 두만강 지역을 안정시킨다.

 

이에 따라 1453년 단종端宗 원년에 북방의 방어와 관리를 위하여

다른 읍성보다 웅장하게 함흥읍성을 축성하였다.

 

함흥읍성은 드넓은 함흥평야에서 생산되는 산물의 집산지이기도 하며

특히 함흥만은 동해안의 군사적 거점으로 중요성이 대단히 높은 곳이다.

 

함흥읍성의 북문 쪽은 반용산의 지형을 이용하여 탕산루구천각이 성문이 되며

서쪽의 성문인 락민루는 성천강에 접하며 함주군 쪽으로 만세교 다리가 있다

 

동문과 남문 쪽은 호련천瑚璉川을 이용하도록 축성築城 하였고

남문의 경우 2층 누각樓閣이면서 눈썹 같은 홍예문虹霓門 임을 알 수 있으며

남문 옆에는 종각이 있어 종을 치면 성문을 열거나 닫습니다.

 

남문과 서문사이의 성 밖에는 아주 많은 민가들이 형성되어져 있는 걸 보아

함흥읍성咸興邑城은 커다란 성이란걸 여실히 증명하여주고 있습니다.

함흥내외십경도咸興內外十景圖에도 咸興邑城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호련천瑚璉川 건너에는 이성계가 살던 함흥본궁咸興本宮이 보입니다.

 

함흥읍성은 1872년에도 개축하여 각 문루와 성벽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나

日本이 점령하여 흥남공업단지를 조성하면서 행정과 군사적인 중심지가 되며

우리 역사歷史를 말살抹殺하려는 日本人들에 의하여 성곽城郭이 헐리면서

우리의 옛 역사시설은 사라지고 편리성 만을 강조하는 군사도시가 되었습니다.

 

함흥咸興의 한겨울은 매우 춥습니다.

개마고원蓋馬高原한 냉한 바람이 부전령산맥 赴戰嶺山脈을 넘어와

함흥咸興에 몰아치면 털 달린 가죽 옷을 입고도 덜덜 떨 지경입니다.

 

얼마나 추웠으면

쌀쌀맞고 人情머리 없이 차가운 여자함흥내기라고 불렀겠습니까.

60년대 말까지도 유행하던 유행어입니다.

 

白石이 근무하는 영생학원永生學園

케나다의 연합교회가 1910년에 永生中學校로 문을 열어

1926년에 永生高等普通學校(이하 永生高普)가 되었으며

永生女子高等普通學校(이하 永生女高普)도 있습니다.

 

永生學園은 크리스천 계통으로 함경도의 명문사학名門私學이면서

日本 순사巡査들의 감시 속에서도 은연중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일깨우다보니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분들을 많이 배출하였지요.

 

白石은 학교에서 가까운 中里의 학부형 집에 하숙을 정하며

眞香은 함흥시내 중심지와 가까운 반용산盤龍山 밑에 하숙下宿을 합니다.

 

白石은 학교 일과가 끝나기 무섭게 眞香의 하숙집으로 달려와

보자마자 꼭 끌어안으며 꽁꽁 언 차가운 손을 眞香의 몸속으로 집어넣으니

眞香은 부르르 떨며 白石을 안고서 얼른 방으로 들어갑니다.

 

男女가 만나 서로 사랑하며 살아감에

眞香의 사랑하는 마음과 그 모습은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밤마다 마주해도 그립고

              밤마다 속삭여도 새롭고

 

              달콤한 사랑에 자다가

              설레어 다시 쳐다보고

 

              사랑의 을 쌓았다 다시 쌓고

              사랑의 그림을 그리다 또 그리고

 

              당신만의 뚜렷한 사상思想과 철학哲學

              당신만의 열띤 강론講論

              당신만의 앳된 듯 순수한 사랑

 

              뱃사공이 되어

              당신만을 실고서

              자유自由의 낙원樂園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당신만을 실고서

              자유自由의 낙원樂園을 향하여

              노 저어가며

 

眞香은 사랑하는 사람과 아침까지 같이 있지 못함을 못내 아쉬워하며

기생妓生이라는 신분이 사랑의 장벽이 되고 있음을 애석愛惜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른 새벽 白石을 보내며 사랑에 대한 애틋한 표현表現이 나타납니다.

 

                눈이 소복소복 쌓인 날

                이른 새벽

 

                어느 틈에 방구들도 식어 버리고

                한밤이 지나

                이제 돌아가야 하는 당신

 

                섭섭한 마음도

                애틋한 마음도

                함흥의 매서운 찬바람에 애는 듯

 

                잡힌 손이 어느 사이

                내 몸을 당신의 오버코트 사이로 스며들게 하여

 

                당신은 내 작은 체구體軀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다

                미끄러져 나둥그레지고

 

                어디 다친 곳은 없소

                서로 옷을 털어주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웃으며

 

                업고가자며 심통을 부리고

                헤어져 돌아서기 싫어

 

                당신의 손을 놓기 싫어

                되돌아오기도 하며

 

眞香의 하숙집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장독을 파는 옹기전이 있고

조금만 더 가면 목욕탕이 있다 그리고 사진관이 있다

白石은 사진관 앞을 지나갈 때마다 진열장에 걸려있는 여자의 사진을 외면한다.

 

                 예쁜 여자 사진인데 왜 안보고 가지요

                 나는 당신 말고 다른 여자는 아예 눈도 주기 싫어요.

 

白石의 함주시초咸州詩抄에 나오는 한편을 읽어봅시다.

 

                바다

 

                바다ㅅ가에 왔드니

                바다와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올으면

                당신이 앞선것만 같구려

                당신이 뒷선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것만 같구려

 

                바다ㅅ가는

                게지꽃에 게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늘에 하이얀 해ㅅ빛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노국공주魯國公主와 공민왕恭愍王의 사랑하는 마음과 그 모습은 어떠할까요.

100여 년간의 나라 지배에서 벗어나

 

요동을 정벌하여 국토를 넓이며 자주국가 고려를 건설하던 공민왕恭愍王

를 이을 후사後嗣가 없는 십여 년간을 후궁後宮을 두지 않으며

 

인질人質인 시절부터 가장 든든한 동반자同伴者이자 협력자協力者

노국공주와 의논하며 나라를 개혁改革하고 혁신革新하는데 전력을 다 한다.

 

노국공주魯國公主가 1365년 2월

혼인 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어렵게 잉태하여

산월産月이 다 되어가며 노산老産으로 병이 위급하여지자

 

일급一級 죄인들을 사면赦免하면서까지 기도祈禱를 올리며

잠시도 魯國公主의 곁을 떠나지 않으며 地極精誠을 드렸다.

 

공민왕恭愍王의 밤낮 없는 정성精誠에도

노국공주魯國公主는 왕자를 낳으려다 저승으로 떠나버리니

그렇게 의지意志와 투지鬪志가 굳건하던 공민왕恭愍王

정사政事에서 멀어져가며 돌보지 않게 되며

 

사랑하는 여인의 무덤 옆에서 잠을 자다가

사랑하는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찾아 저승으로 가신다.

 

노국공주魯國公主와 공민왕恭愍王의 이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이야기는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도 절절히 많이 나온다.

 

李成桂가 호련천瑚璉川 우물가에서 만나

백년해로를 하는 그 여인은 청주한씨 한경의 둘째 딸인 韓慶女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신의고황후한씨 神懿高皇后韓氏라 칭송을 받는다.

 

그때부터 전주이씨全州李氏와 청주한씨淸州韓氏는 서로간의

좋은 인연이라 하여 혼인을 맺는 풍습風習이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한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선 뒤에

조선朝鮮의 왕과 왕비가 아니면 모실 수 없는 종묘宗廟

공민왕恭愍王이 있고 恭愍王 곁에 노국공주魯國公主도 있다. 

 

"恭愍王魯國公主의 사랑은

일반 다른 왕과 왕비와는 달랐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臣下들 뿐 아니라 일반 百姓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恭愍王 가는 데는 노국공주魯國公主도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

민간 신앙으로까지 만들어지고,심지어 조선의 종묘에

고려 '恭愍王 사당祠堂'까지 만들어졌을 정도로 말입니다."

 

- 이형우 박사 (서울시 문화재과 팀장)

 

공민왕恭愍王과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지극한사랑

마지막까지 순절殉節을 지키는 공민왕恭愍王의 애달픈 모습

버드나무 이파리에 인연이 되어 한평생 지아비를 섬길 수 있는 한경녀 韓慶女

 

그러나 眞香은 이렇게 거창巨唱한 사랑보다도

알뜰한 작은 사랑을 일평생 간직하며 白石만을 사랑하다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안타깝게 이승以乗을 떠납니다.

 

18. 사랑하는 자야子夜

 

********* 학교에서 한문을 배우지않은 세대가 있어 읽기에

                 불편하다 하여 부드기 한문을 많이 빼도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