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를 찾아

길상사를 찾아11 함흥생활

서 휴 2013. 5. 2. 01:20

길상사 吉祥寺를 찾아

서길수

 

 

11. 함흥생활咸興生活

 

 

함흥咸興 시내의 반용산盤龍山은 

완경사緩傾斜와 급경사急傾斜로 적절히 이루어져있으며,


소나무, 신갈나무, 산 벚나무, 팥배나무, 잣나무, 단풍나무 등

숲이 많이 우거져 아름다우며 꿩·다람쥐 등 산짐승이 많았다.

 

함흥咸興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태어나 자란 곳으로


산정山頂에는 봄과 가을에 초제醮祭를 지내던 사당祀堂

통신通信 수단으로 활용하는 봉수대烽燧臺가 잘 보존되어 있던 곳이다

 

산 일대가 시민市民들의 공원公園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사방으로 펼쳐진 시가지市街地와 함흥만咸興灣의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일본日本

우리의 종교宗敎와 사상思想과 자유自由를 없애고자 

억압抑壓하며 영구永久 식민지植民地로 종속從屬시키기 위하여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라며 교육敎育을 시켰으며

어디에서든 잘 보일 수 있도록 반용산盤龍山에 신사神社를 세웠다.

 

神社에서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메이지 천황을 

제신祭神으로 삼아 숭배崇拜하게 하였으며

어린 학생에게 까지도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强要하였다

 

지금도 일본日本은 잘못을 반성反省하지 않으며 

천황天皇을 숭배崇拜하며 다시 군국주의軍國主義 국가國家가 되고자 

염치廉恥없는 짓을 하고 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함흥영생고등 보통학교는 

반용산盤龍山 밑에 있으며


白石학교 근처 중리中里에 있는 

학부형學父兄 집에 하숙下宿을 하였다

 

眞香은 반용동盤龍洞에 하숙下宿을 하며 

白石의 하숙下宿집과는 대략 1키로 정도의 거리가 

있는 것으로 짐작이 간다.

 

     처음에 딸아이를 얼라라고 합데

     크니 체네라고 하지 않슴 메

     시집가니 집난이라고 하지비

     얼라를 낳으니 아어미라고 합데

     이렇게 늙으니 아마이라고 하지 않슴 메

 

서울에서 자란 眞香은 처음 듣는 함경도 사투리에 

숨이 넘어갈듯 웃으니

무스거 그리 웃붐 메 라고 말을 한다.

眞香이 주인아주머니와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하루는 하숙집 아마이를 따라 시장市場 구경을 따라나선다.

시장은 꾀 큰데 남자들은 드물고

건전健全하고 튼튼한 아마이들이 나와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만나고 헤어질 때는

이 봅세, 내일 다시 봅세 하고 인사하는 모습을 본다.

 

함흥咸興의 상인商人들은 말씨부터 억세고 다부진 느낌을 준다.

장사하는 아마이 들의 앞 저고리 옷고름에는

한량이 넘는 손 가락지 모양이나 말발굽 모양의 금덩어리를 달고 있었다.

 

번쩍번쩍 빛나는 이 금덩어리는 패물佩物과 같은 것으로

비상시非常時에 쓸 비상금非常金 역할을 하며 

또한 여윳돈이 있는 사람이라고

장사꾼으로써 자신의 신용도信用度를 보여주는 것일 것 같다

 

眞香은 억세면서도 다정다감多情多感하며 

현실적現實的이며 도 다부지게 살아가는 

건전健全한 북관北關 여성들의 생활태도生活態度를 보며


북관北關 여성女性들처럼 삶의 투지鬪志와 용기勇氣가 있었더라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고생苦生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북관北關 여성의 그 빛나는 금패물金佩物도 

일본日本의 공출供出로 인하여

시장市場에서 보이지 않게 된다.

 

단지 해관 신윤국 선생님을 찾아뵙겠다는 일념으로 

찾아 간 함흥 땅


그러나 우리나라의 사상가思想家나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들이나

독립 운동가獨立運動家들은 일절一切 면회面會가 되지 않음에도

 

眞香은 혹시나 할 수 있는 방법方法이 있지나 않을까

하루하루 흐르는 날짜에 조바심을 느끼며 생활한다.

 

 

절망絶望

 

 

北關의 게집은 튼튼하다

北關의 게집은 아름답다

아름답고 튼튼한 게집은있어서

힌저고리에 븕은 길동을달아

검정치마에 봧어입은것은

나의 꼭하나 즐거운 꿈이였드니

어늬아츰 게집은

머리에 묵어운 동이를이고

손에 어린것의 손을끌고

가펴러운 언덕길을

숨이차서 올라갔다

나는 한종일 서러웠다

 

 

北關

 

 

明太창난젖에 고추무거리에 막칼질한무이를 뷔벼익힌것을

이 투박한 北關을 한없이 끼밀고있노라면

쓸쓸하니 무릎은 꿀어진다 

시큼한 배척한 퀴퀴한 이 내음새속에

나는 가느슥히 女眞의 살내음새를 맡는다 

얼큰한 비릿한 구릿한 이 맛속에선

깜아득히 新羅백성의 鄕愁도 맛본다


 

우리가 白石의 함주시초咸洲詩抄의 시들을 읽다보면

함흥咸興 보다는 함주咸洲나 북관北關이란 단어單語가 많이 나온다.

 

1807년 홍의영洪儀泳이 순조純祖임금님께 올린 북관기사北關紀事라는

책에는 함경도咸鏡道의 마천령摩天嶺을 넘어

 

북쪽을 함경북도咸鏡北道 또는 북관北關이라 하며

남쪽을 함경남도咸鏡南道 또는 남관南關이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예로부터 함경도咸鏡道를 남북南北으로 구분하지 않고

그리 북관北關이라 불러왔으며 


함흥咸興의 원래 이름이 함주咸洲였으며

그 후 함흥咸興 함주咸洲군에 속하였다가

함흥시咸興市로 독립獨立하여 분리分離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때 함흥시咸興市와 흥남시興南市의 인구를 합하면 

약10만 명이 넘으니

그 당시로써는 엄청나게 큰 지역地域이다

 

지금은 평양平壤 다음으로 큰

인구人口 약 100만 명에 가까운 함흥직할시咸興直轄市가 되어있다

 

白石은 1936년 4월부터 함흥영생고등 보통학교 영어선생으로 근무하며

함흥생활咸興生活 을 시작하였다

 

김희모 라는 분께서 그 당시의 함흥영생고등 보통학교 3학년 때 만난

白石 선생님에 대하여 회상回想하며 쓴 이야기를 간추려본다

 

<내 고보시절의 은사 백석선생>(월간 현대시 1990.5)

 

모발은 모두 뒤로 넘어가도록 올백 형으로 빗어 올리고

유난히 반짝이는 가죽구두,

두 줄 단추가 가지런히 반짝이는 

양복차림의 멋스러운 젊은 모던보이 선생님

 

이런 옷차림과 멋스러운 스타일은 

고작 인구5만밖에 안 되는 함흥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세련된 멋쟁이였습니다.

 

우리는 白石 선생님의 영어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로부터 사흘 후

 

선생님은 2학년 담임이신데도 3학년인 우리 반에 들어오시어

우리 반 50명의 학생들 이름을 얼굴만 보며 

이름을 불러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단 하나도 착오 없이 정확한 호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날부터 白石 선생님의 비상한 기억력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버렸다

 

매일 숙제를 내주시고 

그 다음날 백지에다 외우고 쓸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엄격하고 철저한 분이셨다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신 白石선생님은

영어교사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우리학교 축구부를 지도하셨다

 

내가 선생님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축구부에서

내가 좋아하는 골키퍼를 맡아 

선생님과 같이 축구를 하였기 때문이다


 

白石이 축구부를 맡아 학생들과 같이 축구를 하며

1938년도에는 경성에서 열리는 

전국 축구대회에 참여하며 서울에 오게 된다.

 

서울의 조선일보朝鮮日報에 근무하다 

함흥咸興에 오게 된 白石


홍원 형무소洪原刑務所에 면회面會하고자 

함흥咸興에 찾아온 眞香

이 두 사람은 어느 날 우연히 함흥咸興에서 만나게 된다.

 

 

12. 子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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