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를 찾아

길상사를 찾아8 찾아오는인연

서 휴 2013. 2. 28. 14:24

 

길상사 (吉祥寺)를 찾아

서길수

 

 

8. 찾아오는 인연因緣

 

 

白石 眞香이 살아왔던 어려운 시대상황을 알아야

그 두 분의 생활모습이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조사하여 보았다

 

싸이’의 ‘강남 스타일’ 처럼 명랑하고 쾌활한 내용이 있을까하는 생각으로 

白石의 시와 眞香내 사랑 白石’을 읽어보았다

 

어린 시절에 대한 白石의 추억은 경쾌한 음악처럼 유쾌하며

眞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둘만의 사랑을 지켜 나가려는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러나 뜻 깊은 ‘삼일절’이니 이글을 올리는 것은

그때의 암울한 시대를 한번쯤 알고 넘어갈까 해서이다

 

일본은 1905년 포츠머스조약에 의하여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만주滿洲의 창춘長春-뤼순旅順간 철도부설권의 이권利權을 획득하고

다롄大連 및 뤼순旅順 지역인 관동주關東州를 조차租借한 이후

 

1920년대에는 만주滿洲에 투자된 외국 자본 중 70% 이상이 일본자본 이었을 정도로

만주는 일본의 새로운 시장으로 중공업重工業 원료 공급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29-39년 발생한 세계 경제대공황은 일본 경제를 어렵게 만들었고

또한 중국 장제스蔣介石의 국권회복운동과

소련이 발전하여 만주지역에 진출하는 상황으로

일본은 만주滿洲 전체를 먼저 점령하여 전체의 이권을 독점할 생각을 갖게 된다.

 

토지조사사업으로 일본인 대지주가 많이 생기는 반면,

조선의 많은 농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생활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어쩔 수 없는 곤경으로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만주滿洲로 간 이민자 수는

1927년 약56만 명에서 1936년 약89만 명으로 급속히 증가했으며

대부분이 궁핍한 농민들이다

 

조선 농민들이 만보산萬寶山 지역에서 농지를 개척하고자 관개수로개설공사 중

물이 서로 필요한 현지 중국 농민들과 조선 농민들 간의 충돌사건을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이라 한다.

 

1931년 7월 2일의 만보산 사건萬寶山事件

중국 만주 지린 성吉林省 창춘 현長春縣 싼싱바오三姓堡 만보산萬寶山 지역에서

조선의 우리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일어난 충돌 사태였다.

 

일본은 이를 조작하고 이용하여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의 민족 간 싸움으로

번지게 하며 국내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인천에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폭동으로 인해 중국인 사망자가 127명 부상자가 400명 이었으며

이후로 우리나라의 화교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1919년 삼일절 이후의 제일 큰 사건이지요.

일본이 조작하여 만들어 냈지요.

 

1931년 9월 18일 류탸오거우 사건柳條溝事件 -만철폭파사건을 조작하여

만주 점령 전쟁을 시작했으며 선전포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일본은 국가 간 전쟁임에도 전쟁이 아닌 만주사변이라 이름 붙이며

이를 구실로 중국 대륙 침략의 발판을 삼는다.

 

1931년 11월에는 소·만 국경을 이루는 東北3省 전역을 장악했고,

1932년 1월에는 일본을 저지하는 장쉐량의 거점인 진저우錦州를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앞세워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

 

일본의 야욕으로 만주를 쳐들어가 중일전쟁中日戰爭을 일으키며

우리나라와 중국을 계속적으로 수탈하여 전쟁 물자를 조달한다.

 

일본은 우리민족의 문화말살시키는 정책을 펴나가면서

한글을 못 쓰게 하고 우리말을 못 쓰게 하는 등 핍박이 극심하였다

 

일본의 우리나라에 대한 식민지 주요 정책은

1) 언어말살. 2) 문자말살. 3) 역사 왜곡. 4) 창씨개명. 5) 토지조사사업.

6) 지하자원 수탈. 7) 공출과 농지 수탈. 8) 철도부설 사업.

9) 항구건설과 개항 10) 인력 징발(병력, 노무자, 정신대, 위안부) 등이다.

 

이극로李克魯 선생은 1922-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에서 공부하며

독일이 폴란드를 지배하면서 폴란드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처럼

일본이 우리 민족의 말과 글을 없앨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선생은 1928년에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이런 내용들에 대하여 강연을 한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가 ‘나라의 독립운동獨立運動에 전심전력하겠다.’고 한

이 연설이 1928년 10월 11일자 하와이 동포신문‘신한민보’에 실렸다.

 

이극로李克魯 선생은 조국에 돌아와 조선어학회에 가담하여 많은 고초를 겪는다.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가 일본의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朝鮮語운동을 통해 독립운동獨立運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眞香은 신의주 앞 압록강 건너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의 지금의 단동丹東인 안동安東에서

안동고녀에 다닐 때의 역사 선생님 말씀을 기억한다.

 

폴란드독일의 지배를 받으며 폴란드 글을 못 쓰게 하자

그 선생님과 학생들은 얇은 모래상자를 갖다놓고

폴란드 말을 쓰다 감시자가 오면 모래상자를 흔든다.

 

眞香은 한글을 쓰고 지우며 지우고 쓰며 스스로 우리 한글을 익히며

품격 높은 우리의 시조時調도 읽고 쓰며 외운다.

 

유명잡지 삼천리에 수필隨筆을 실으며 문학기생文學妓生이라는 소문이 퍼져나가

조선어 학회朝鮮語學會의 해관 신윤국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장차 나라에 필요한 인재로 인정받아 그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된다.

 

조선어 학회朝鮮語學會는 우리말과 글의 연구를 위하여 만든 학술 단체이며

국어학자 주시경周時經 (1876.12.22-1914.7.27)선생의 문하에 있던 학자들이

1921년12월 3일에 만들었으며 현재의 한글학회를 말한다.

 

해관 신윤국(신현모)님은 일제강점기 때 천석千石꾼 부자이나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를 돕다가 감옥까지 갔다 온

해방후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을 지내신 애국자 신현모(신윤국)님 이시다.

 

식민지시대 어려운 그 당시에도 부자나 작은 사업가들도

나라를 위하여 돈을 쓸 줄 아는 애국자가 많았다

 

일본 유학길에 오른 眞香은 도쿄 문화학원東京文化學院 3학년에 편입하여

누추한 다다미방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의사나 교육자가 되고 싶어 했다.

 

이때의 도쿄생활 중에서 하숙집 주인에 대한 한 가지 이야기를

眞香은 이렇게 썼다

 

하숙집 주인은 자동차를 운전하는 젊은 기사였는데 술을 마시면

포악한 성격으로 변하여 부인의 머리채를 잡고 마구 때리며 발로 찼단다.

‘왜 무서운 매를 빨리 피하지 못하세요’ 하니

 

‘일본 사내들은 기가 단해서 우선 여자의 고개가 돌아가도록

한 대 때려놓고 시작하지요’ ‘도저히 피할 틈이 없어요’

‘홧김에 마구 욕까지 퍼붓지요’

 

일본은 70년대 까지만 해도 가정폭력이 가장심한 나라였다 한다.

‘일본 사내들은 기가 단해서’라는 말은 참 정확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독도’ 문제나 ‘위안부’ 문제 등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걸 보면

일본 사내들의 짧은 식견이나 짧은 행동을 쳐다볼 수 있다.

 

미래학자들의 이야기를 빌리면

2020년경에는 우리나라의 GDP가 일본과 같아지며

2050년경에는 우리나라의 GDP가 일본의 배가 된다니

이제 우리의 국운國運이 돌아오는 것 같아 열심히 살아야겠다.

 

어느 날

당시 연희전문 교수이며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에 관여하던 최순주崔淳周 임이

학교의 교무부에 들려 眞香이 우수한 학생임을 확인하고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한다.

 

‘사실은 신 선생님과 우리 몇 사람이 당신을 하와이로 유학을 보내어서

장차 조선의 여성일꾼을 만들고자 의논 중이오

 

보아하니 당신은 이곳에서도 자기 일을 훌륭히 해 나가는구려.

과연 틀림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소‘

 

최순주崔淳周 님은

해방후 재무부 장관국회부의장을 지내신 분이다

 

眞香은 해관 신윤국님과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무한한 감사를 드리며 꿈을 안고 더욱 열심히 공부하며

하와이에 유학 갈 준비를 서두른다.

 

이제 또

운명을 좌우하는 새로운 인연因緣이 찾아온다.

 

白石 그는

일본이 우리말과 글을 못 쓰게 하며 우리문화를 없애는 참담한 시기에

 

 

지방 사투리까지 섞어가며 재미있게 이야기하듯

순수한 우리말 시를 과감히 쓰고 발표하므로 써

민족의 영혼을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으니

얼마나 돋보이는 존재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9. 함흥咸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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