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열국지( 001∼100회)

제 10 화. 강태공의 일생은 어떠한가.

서 휴 2023. 4. 19. 15:03

제 10 화. 강태공의 일생은 어떠한가.

 

       주왕(紂王)에게 직간(直諫)하다가 쫓겨나, 어려운 난세에도

       매우 어질게 살며 칭송받는 상용(商容)에게 표창하면서

       서로 도우며 사는 그의 마을 사람들에게도 상을 내렸다.

 

주무왕(周武王)은 비록 멸망한  상(商) 나라지만, 그들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줄 수 있도록,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에게,

봉지(封地)를 내려주면서 민심을 안정시켜 나갔다.

 

      이렇게 5년이 지나가며 천하가 안정되었다고

      판단 되자, 주무왕은 기원전 1046년에, 주(周)나라가

      천하의 새로운 왕조(王朝)임을 선포하였다.

 

      주(周)나라의 수도를 풍읍(豊邑)에서 시안(西安) 근처의

      호경(鎬京)으로 옮기고, 이를 종주(宗周)라 불렀으며

 

      왕실의 종묘(宗廟)가 있는 풍읍(豊邑)을 풍경(豊京)이라

      고쳐 부르게 하며, 주왕(周王) 13대까지 풍경(豊京)에서

      나랏일을 보았다. 이때를 서주(西周) 시대라 부른다.

 

주무왕은 비로써 왕실의 예법으로, 할아버지 고공단보(古公亶父)를

태왕(太王)으로 추숭(追崇)하여 주태왕(周太王)이라 받들게 하였고,

아버지 서백(西伯) 희창(姬昌)을 주문왕(周文王)으로 추존(追尊)하며, 

모두 태묘(太廟)에 위패(位牌)를 모셨다.

 

       또한, 논공행상을 하기 위해 상(商)나라 때의

       공(公), 후(侯), 백(伯)의 3 작위(爵位)에서

       자(子), 남(男)을 더하여 5 작위(爵位)로 늘리었다.

 

작위(爵位)를 받은 귀족은 여러(諸) 가지를 살펴야(侯) 한다는

뜻으로 제후(諸侯)라 부르게 되며, 제후(諸侯)가 다스리는

봉지(封地)를 제후국(諸侯國)이라 부르게 되었다.

 

       주무왕(周武王)이 나누어준 봉지(封地)는

       동성(同姓) 제후국(諸侯國)이 약 56개이며,

       성(姓)이 다른 이성(異姓) 제후국(諸侯國)이 70여 개며

 

       작위(爵位)를 받지 못한 부족국(部族國)까지 합한다면,

       200여 개의 나라가 있었다고 추측되므로, 이들을

       봉건국가(封建國家)라 부르게 되며, 이때부터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열국(列國)이라 부르게 되었다.

 

강태공은 일등공신이 되었으므로 땅이 비옥하고, 물산(物産)이

풍부하며, 자기의 고향인 하내(河內)가 있는 산동반도(山東半島) 

지역을 봉지(封地)로 받았다.

 

       사상보(師尙父)께서는 동쪽으로 동해까지

       서쪽으로 황하(黃河)가 닫는 곳까지

       남쪽으로 목령(穆岭)에 이르기까지

       북쪽으로 무채(无棣) 끝까지,

       복종하지 않는 자는 군사를 풀어 정복하라!

 

강태공은 주무왕이 내린 칙지(勅旨)에 따라, 제일 광활한 지역을

하사받게 되었으므로 명실공히 대국의 행렬에 서게 되었다.

 

       강태공은 제(齊) 나라의 정치제도를 개혁하여,

       복잡한 제도와 절차가 많은 예절을 간소화하면서,

       천하 상인들이 모여들도록 상업을 발전시켜 

       그 당시에 가장 잘사는 제(齊) 나라를 만들었다.

 

강태공은 어릴 때부터 빈한한 생활을 하다가, 80세인 고희(古稀)의

나이에 주문왕(周文王)에 발탁되어, 주(周)나라의 재상이 되었으며,

주문왕이 죽자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을 도와 기어이 상(商)나라를

무너트리고, 천하의 주(周)나라 왕조를 세웠다.

 

       강태공(姜太公)은 성(姓)이 강(姜)이며,

       씨(氏)는 여(呂)이고, 이름은 상(尙)이므로

       강상(姜尙) 또는 여상(呂尙)이라 불렸다.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강상(姜尙)은 위수(渭水)의 반계(磻溪)에서

       몇십 년간 명상하다 주문왕(周文王)에 발탁되어

       왕의 으뜸 스승이라는 사상보(師尙父)가 된다.

 

       이에 강상(姜尙)은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리게 되고

       강태공(姜太公)이라는 별칭이 생겨난다.

 

       주문왕(周文王)이 죽자,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을 도와

       상(商)나라를 멸시키고 천하의 주(周)나라를 세웠다.

 

        그 공로로 강태공(姜太公)은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영구(營丘) 땅에 제후로 봉해져 제(齊) 나라를 세웠다.

 

강태공(姜太公)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일설에 따르면 기원전 1173년인 은(殷)나라 경정왕(庚丁王) 때

태어났으며, 주(周)나라 주성왕(周成王) 7년인 기원전 1034년에

이르러 139세가 되자, 제(齊) 나라에서 죽었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군주를 모셨던 많은 참모 중에

        강태공(姜太公)처럼 화려한 사람은 없었다.

 

        사(師스승) 중에 가장 존경받는 사상보(師尙父)가 되어

        주문왕(周文王). 무왕(武王). 성왕(成王). 강왕(康王).

        4대에 걸쳐 왕의 스승인 태사(太師)를 지냈다.

 

강태공이 제(齊)나라에서 죽었음에도, 주(周)나라 왕실이 있는

풍경(豊京)까지 와서 장례를 치렀으며 또한, 그를 포함하여

5대손에 이르기까지 풍경(豊京)까지 와서 장례를 치렀다.

 

       古之人有言 曰狐死正丘首仁也

       (고지인유언 왈호사정구수인야)

 

       이를 두고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여우가

       죽더라도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 는 뜻이다.

 

예기(禮記)의 단궁(檀弓) 상편(上篇)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강태공(姜太公)이 죽은 후에도 풍경(豊京)에

돌아와 장례 치르는 것을 두고 예(禮)란, 그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강태공은 자기의 용맹만을 믿거나, 적을 가볍게 여기지 않은

인물이며, 정치투쟁(政治鬪爭)에 군사 전술을 접목한 최초의

인물이었기에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인물이자

       군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좌했던 유능한

       정치가이자, 군사 전술가의 대명사로 꼽힌다.

 

       세상에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며

       사람의 의지(意志)가 살아가는 힘이란 걸

       일깨워 주며 인식하게 한 인물이다.

 

       그는,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천하라는 더욱

       진보(進步)적인 인식을 보여주었다.

 

강태공은 미신과 귀신을 숭배하던 풍조를 배척하였으며, 오르지

사람의 의지가 모든 변화의 원동력이란 걸 정확하게 인식시켰다.

 

       보이지 않는 인의도덕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며,

 

       백성의 실질적인 이익과 행복을 같이 나눌 때

       나라가 잘되고,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처신하였으므로, 상(商)을

       멸하고 주(周)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이에 강태공(姜太公)은 난세(亂世)를 평정한 인물이며,

       민본주의(民本主義)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강태공은 80의 나이에 시작하여, 끝내 천하를 평정시킨 인물이며,

끊임없이 노력하여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으므로, 그를 볼 때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여준다.

 

       사상보(師尙父)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시오?

       주상! 백성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 오며

       백성의 민심을 받쳐주어야 하나이다.

 

       주상! 백성의 민심은 큰 물결과도 같아

       잘 흘러가도록 물꼬를 터주고,

       넘치는 걸 대비하여 둑을 쌓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을 안 만든다는 것이오?

       그렇사옵니다. 있는 법만으로도 되옵니다.

 

       다만, 인(仁). 의(義). 충(忠). 신(信). 용(勇. 모(謀)

       라는 여섯 가지 지켜야 할 육수(六守)를 정하여,

       백성들 스스로 지켜나가게 하는 것이옵니다.

 

       민심은 통치자보다 공평하고, 앞서가는 것이기에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하옵니다.

 

       주상! 백성은 잘 먹고, 잘 살아가기를 원하므로,

       신은 오직 백성이 잘살도록 보살피면서

       그저 도와주고 있을 뿐이옵니다.

 

일설에 의하면, 강태공은 기원전 1034년에 신선계에 들었었다고

하며, 주(周)나라 왕실은 그의 의관을 서주(西周)의 호경(鎬京)에

안장하였으며, 제(齊)나라 사람들은 강태공의 덕을 기리기 위해,

제(齊)나라에도 강태공의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큰 그릇을 만들려니 시간이 더 걸려

       뒤늦게 나 마 이루어진다는 뜻이려니

 

       크게 될 사람은 속절없는 세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으며, 품은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피나는 집념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오르지, 다가올 때만을 기다리면서

       목표대로 달려만 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원하는 뜻을

       이루게 된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大方無隅 (대방무우) 큰 각은 모퉁이가 보이지 않으며

大器晚成 (대기만성)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大音希聲 (대음희성) 큰소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大象無形 (대상무형) 큰 형상은 모양이 없는 듯하다.

 

       노자(老子)는 노자(老子) 41장에서 나오는 말처럼

       위와 같은 말로 도(道)의 깨우침을 비유하였는데

 

       도(道)는 항상 사물의 뒤에 숨어 있는 듯하여

       쉽게 단정할 수도 또, 부정할 수도 없으므로

       도(道)를 이루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에서 대기만성(大器晚成)이란 말을 썼다.

 

제 11 화. 최초의 반란이 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