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화. 주공 단의 업적은 어떤가.
형님,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살려달라니,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느냐?
비록 형제라고 하나 용서할 수 없도다!
반드시 반역의 뿌리는 완전히 뽑아야 한다.
반란에 가담한 역신들은 모조리 죽여라!
주공(周公) 단(旦)은 친동생인 관숙(管叔)과 채숙(蔡叔)과 주동자
무경(武庚)을 용서치 않고 참수시켰으며, 또한, 무경(武庚)이
다스리던 땅에 동생인 강숙(康叔)을 보내 새롭게 위(衛) 나라를
봉건(封建) 하고 다스리게 했다.
강숙(康叔)이 받은 위(衛) 나라는 황하(黃河)와
기수(淇水)가 서로 만나는 유역이며 비옥한 곳이었다.
무경(武庚)의 숙부 되는 미자(微子)에게 공작(公爵)의
작위를 주면서 송(宋)나라 제후가 되게 하였으며,
상(商)나라 유민 일부를 이주시키면서
상(商)나라 조상의 제사를 이어가게 하였다.
주공(周公) 단(旦)은 어렵게 삼감(三監)의 난을 수습하고 나자,
몇 차례의 정벌에 나서며 황하(黃河) 유역인 화북(華北)의
평원(平原) 대부분을 왕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7년 만에 주성왕(周成王)이 성인이 되자
깨끗하게 섭정을 끝마치며 정권을 돌려주었다.
주공 단은 근면하고 아주 공평하게 국사를 봤으므로, 이에 감복한
주성왕(周成王)은 크게 감동하여 태묘에 제를 지내는 행사에서
소비(小毖)라는 시를 지어 읊었다.
소비(小毖)는 지난날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막는다는 뜻으로 징전비후(懲前毖後)를 말한다.
노(魯)나라로 돌아간 주공(周公) 단(旦)은 동쪽 지역을 담당하기
위해, 천하의 중심지인 낙읍(洛邑) 자리에 부도(副都)를 세우고
이를 알리는 시를 지어 올렸다.
또한, 예악(禮樂)의 기초를 만들었으며,
팔괘(八卦)의 효(爻)를 해설하여 역경(易經)을
완성했으며, 아울러 주(周) 나라의
주례(周禮)와 의례(儀禮)을 저술하였다.
주공 단(旦)이 태어나고 죽은 해는 분명치 않다.
그의 묘에 대해서도 그 위치가 불확실하였으나
2004년에 산서성(陝西省) 보계시(宝鶏市)에 있는
주공묘(周公廟) 부근에서 발견된 무덤을
주공(周公) 단(旦)의 묘(墓)로 보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 상서(尙書)에서 나오는 치우(蚩尤)는 고조선인
환웅(桓雄) 임금이며, 동북아 최초로 청동(靑銅)을 만들어
사용하던 선진의 나라였다.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을 표방하는 환인(桓因. 7대),
환웅(桓雄. 18대), 단군(檀君. 47대) 시대를
이들 모두 고조선(古朝鮮) 이라 부른다.
옛날 황제(黃帝)는 환웅(桓雄)인 치우(蚩尤) 왕과 오랜 전쟁을
하다가 겨우 마지막에 승리하게 되자, 그 기념으로 치우(蚩尤)를
본받아 청동으로 된 정(鼎)을 만들었다.
이는 황제(黃帝) 시대인 하(夏)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으며, 후대까지 왕위를 계승할 때 사용하는 자랑스러운
전통 물건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정(鼎)은 세 발 달린 청동 솥으로 천제(天祭)를 올릴 때
향을 피우는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솥이다.
이에 주공(周公) 단(旦)은 주(周)나라가 안정되자, 전국 각지의
9주(九州)에서 청동(靑銅)을 거두어 다시 정(鼎)을 만듦으로써
천하의 백성들에게 주(周)나라 왕실의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뒤이어 동쪽의 회이(淮夷)를 정벌하고,
엄(阉) 나라를 멸한 뒤, 송(宋)나라를
박고(薄姑) 땅으로 옮기게 했다.
주성왕(周成王) 대에 세워진 이름 있는 나라는 송(宋),
위(衛), 노(魯), 진(晉), 초(楚), 채(蔡), 담(聃) 이다.
주성왕(周成王)의 동생인 숙우(叔虞)는 당(唐) 땅을 받았으므로
진(晉) 나라의 시조가 되며, 당숙우(唐叔虞)라 부르게 되며
진(晉) 나라를 당진(唐晉)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다른 동생들은 한(韓), 우(邘), 응(應), 세 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주성왕(周成王)은 주무왕(周武王)의 유업을
계승 받아, 오로지 정사에만 정진하며
부도(副都)인 낙읍(洛邑)도 경영하였다.
주공(周公) 단(旦)의 보좌를 받으며 열심히 나라를 다스리던
주성왕(周成王)도 세월이 흐르자 노병으로 죽었다.
주성왕(周成王)의 유언에 따라 소공(召公) 석(奭)과
필공(畢公) 고(高)의 도움을 받으며 21세가 된 아들
희조(姬釗)를 왕위에 올려 주강왕(周康王)이 되었다.
이때가 기원전 1020년이었다.
주강왕(周康王)은 주성왕(周成王)의 유언에 따라 절대로 탐욕
하지 않으면서 근검절약하며 열심히 나라를 다스린다.
문무백관들은 들으시오!
선왕이신 주성왕(周成王)의 유언을 지켜야 하오!
주문왕과 주무왕의 공적을 찬양하는 글을 만드시오!
이를 천하에 돌려 주(周)나라에 복종하게 해야 하오!
이때 만든 글을 강고(康誥)라 한다. 그리고 주강왕(周康王)은
필공(畢公) 고(高)에게 특별히 명하여 신하들에게 자신이 맡은
임무를 모두 열심히 다할 것을 당부하게 했다.
풍경(豊京) 성은 좁아서 호경(鎬京)을
우리 주(周)나라의 수도로 삼을 것이오!
짐의 거처도 풍경(豊京)에서 호경(鎬京)으로
옮길 것이니 마지막으로 모든 제후를 부르시오!
풍경(豊京)에서 마지막 조회를 해봅시다!
천하의 제후들을 모두 불러 풍경(豊京)에 모이도록 한 것은
옛날 주무왕(周武王)이 상(商)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맹진(孟津)
나루터에서 황하를 건너와 제후들에게 맹세한 태서(太誓)의
서약을 지키려 한 것이었다. 이것을 풍궁(豊宮)의 조회라고 한다.
주강왕은 재위 12년인 기원전 1009년 6월에
풍경(豊京)의 태묘(太廟)에서 제사를 올렸다.
필공(畢公) 고(高)는 비록 주공(周公) 단(旦)의 이복동생이었으나
끝까지 신의를 지키며, 상(商)나라 유민들을 계속 교화시켜
나갔으며, 그리고 이름난 산과 큰 강에 가서 성을 쌓았다.
주(周)나라가 건국된 이후로 주성왕(周成王)과
주강왕(周康王) 때까지 나라의 기강을 확립하면서
처음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때를 건국 이래 문화가 가장 창성(昌盛)한 시기라고 하면서,
성강지치(成康之致)의 시대라 부르며 태평성대라고 하였다.
주강왕은 재위 25년 만인 기원전 996년 죽었다.
아들인 희하(姬瑕)가 주소왕(周昭王)이 되었다.
주소왕(周昭王)은 즉위 원년인 기원전 995년에
동이족(東夷族)이 쳐들어오자 물리쳤다.
재위 11년, 재위 14년, 재위 16년에
초(楚)나라 정벌을 떠났으나 병력만 잃고 돌아왔다.
자주 군사를 징발한 주소왕(周昭王)은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자, 재위 26년이 되자 백성에게 존경받을 일을 꼭 해내겠다면서
제후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얼마 안 되는 왕사군(王師軍) 만으로
무리하게 초(楚) 나라를 정벌하다가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
주소왕(周昭王)은 남쪽으로 사냥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고 있는데 무슨 일이 있는 거요?
아닙니다! 사냥 나간 게 아니랍니다!
형초(荊楚) 사람이 하얀 꿩(白雉 백치)을 바치려
하자, 흰 꿩은 길조(吉兆)의 새라 하시며
친히 백치(白雉)를 받으려 남쪽으로 갔답니다.
아니요. 순수(巡狩)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답니다.
아니요, 순수(巡狩) 갔다가 죽은 게 아니라
형초(荊楚)에 쳐들어갔다가 패하여 죽었답니다.
형초(荊楚)라면 초(楚)나라가 아니오?
그렇지요. 초(楚)나라가 맞지요!
그렇다면 초(楚)나라가 죽인 것이 아니겠소?
나도 들은 이야기 오만 강에 빠져 죽었답니다!
그렇소. 나도 그렇게들은 바가 있소!
소왕(昭王)이 한수(漢水)에 빠져 죽다니 참말이오?
그렇소. 한수(漢水)를 타고 갈 때 미리 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어, 아교와 흙으로 구멍을 막았는데
배가 강 중류를 지날 무렵에 아교와 흙이 녹아
구멍이 뚫리면서 배가 가라앉았다고 하네요.
허허, 누가 그럽디까?
겨우 살아난 호위 군사가 하는 말이지요.
허 어. 보통 일이 아니네요.
글쎄 말이외다!그놈들이 우리 왕을 죽이다니요?
앞으로 초(楚) 나라와 전쟁이 일어나겠네요.
초(楚)나라뿐만이 아니지요?
융족(戎族)들도 변방(邊方)을 괴롭히고 있으니
융족(戎族)들을 먼저 정리하고 나야!
그다음에 초(楚) 나라에 쳐들어갈 수 있지 않겠소?
여씨춘추(呂氏春秋)와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에 따르면,
주소왕(周昭王)이 제후국의 도움을 받지 않고, 초(楚) 나라를
정벌하려고 원정(遠征) 나갔다가, 패하여 도망가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크기에, 제후들에게 공표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주소왕(周昭王)이 초(楚) 나라의 원정 도중에 행방불명되자,
임시로, 그 아들인 만(滿)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정사를 보다가,
그 이후 주소왕(周昭王)이 죽은 것으로 판명되자, 정식으로
주목왕(周穆王)이 되었다.
나, 주목왕(周穆王)은 우리 주(周) 나라의 전통에 따라
친정(親征)에 나서, 주변의 오랑캐를 무찌를 것이요!
나는 아버지 소왕(昭王)께서 남방 정벌에 실패하시고,
목숨까지 잃은 것을 거울삼아!
우선 서북쪽 융족(戎族)들을 토벌해버리고
그리고 반드시 초(楚) 나라를 정벌하고 말 것이오!
주목왕(周穆王)이 필요 이상으로 견융(犬戎) 등을 토벌하자,
보다 못한 제공모부(祭公謀父)가 간곡히 만류하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고집대로 공격하자, 주변의 융족들에게
반감을 사게 되면서, 주(周) 나라 또한, 국력이 쇠퇴해졌다.
제 13 화. 주는 고조선의 작은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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