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상사를 찾아

길상사를 찾아7. 기생

서 휴 2013. 2. 26. 11:35

길상사 吉祥寺를 찾아

서길수

 

7. 기생妓生

 

 기생妓生

 

 하늘에서 내려 보냈나

 땅에서 솟았나.

 

 내 운명運命

 내가 기생妓生이 될 줄

 누군들 알 수 있었으랴

 

 여자로써 애교가 많고 붙임성이 남보다 좋으면

 기생팔자妓生八字라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무수한 여인들이 기생妓生 이었겠지

 그러나 기생妓生은 많지를 않으니

 살아가는 환경 때문일까

 

 아름다운 모습에

 하기 힘든 예지藝智를 갖춰야 하기 때문일까

 

 아름다운 예지藝智

 힘들게 갖추어 살아가면서

 

 어느 기생은 지아비를 잘 만나 사랑을 받고

 어느 기생은 한사람만의 사랑을 한없이 기다리며

 

 어느 기생은 돈을 모아 부자가 되고

 어느 기생은 몸을 팔아도 살기 어려워

 

 어느 기생은 노래와 춤을 추며 세상을 날아다니고

 어느 기생은 임과 함께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니

 

 사람의 운명과 팔자는 알 수 없는 듯

 더욱이 기생妓生의 팔자는 더 알 수 없는 듯

 

 기생의 운명運命 하늘에서 내려 보냈나

 땅에서 솟았나

 


기생妓生이란 말은 기녀妓女라는 말과 같다

기녀妓女라는 말은 중국에서 많이 쓰고 있으며 일본에선 예기芸妓라 한다.

우리는 생동감生動感있게 기생妓生이라 부른다.

 

기생妓生이란

관기官妓 ·민기民妓 ·약방기생藥房妓生 ·상방기생尙方妓生

모든 예기藝妓를 한 번에 부르는 이름이다

 

우리역사상 기생제도妓生制度에 대한 기록記錄

신라新羅 진흥왕 때 음악교육기관인 음성서音聲署가 있었다하나

자세하게 기록된 내용이 없으며

고려高麗의 고려여악高麗女樂 등에 대해서는 기록이 제대로 나온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기생妓生은 음악을 관장하던 장악원掌樂院에서

몇 년간 가무歌舞, 시, 서화書畵 등과 예절禮節에 대한 교육을 받아

글과 그림과 노래와 춤에 능하여

 

비록 신분은 약하나 예인藝人으로

배운 사람으로 통하였다한다.

 

관기官妓 라는 제도는 지방이나 고을의 관아官衙에서

관리들에게 음식이나 바느질 차의 심부름 등으로

 

관아官衙 내부에서 여자들이 담당하여야 하는

일을 맡아보던 기생妓生들을 말하며

 

이 여인들은 나라에 예속隸屬된 노예奴隸되어 있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보니


관아에 찾아오는 관리들이나 일반손님을 수발하여주며

잠자리를 보살펴주는 등의 일도 하다 보니

 

풍기가 문란 해 지면서 창기娼妓가 되어

어쩔 수없이 몸을 내주어 천한 기생 취급을 받게 되었다 한다.

 

이러한 폐단弊端은 춘향전春香傳의 기생 점고點考하는 대목에서 볼 수 있다.

기생妓生 점고點考라는 것은

기생妓生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사람의 수효數爻를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지방관아地方官衙의 수령守令들이 처를 두고 부임赴任하는 경우가 많아

부임지赴任地에 첩을 두거나 관기官妓에게 수발을 들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

관기官妓들은 서로 잘 보이려 곱게 단장을 하고 기생 점고를 받았다고 한다.

 

관기官妓와 다르게 일반 여념 집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어떤 환경에 따라 기생妓生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를 민기民妓라고 보시면 될 것 같다.

 

민기民妓는 대부분이 어렸을 적에 기방妓房에 들어가

기생 수업授業을 받아 기생이 되는데

때로는 다 자란 처녀가 스스로 기방妓房에 찾아가 곧바로 기생이 되기도 한다.

 

열 살의 나이어린 소녀가 어느 가을날

전라북도 부안의 백운 사에서 지은 시한수를 읽어보자.

 

     백운사白雲寺

 

     걸어서 백운사에 올라와 보니            步上白雲寺(보상백운사)

     흰 구름 사이에 절이 떠있네              寺在白雲間(사재백운간)

     스님 저 흰 구름 쓸지 말아요             白雲僧莫掃(백운승막소)

     마음과 구름 다 한가롭다오               心與白雲閑(심여백운한)

 

 

조선시대 선조대왕宣祖大王 때의 여류시인 매창梅窓 의 어릴 적 시이다

 

매창梅窓 은 전라북도 부안扶安에 살았던 기생이며

 

이탕종李湯從의 딸로서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며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고도 하였으며 계랑癸娘 桂娘이라고도 불러 

매창梅窓에게 오는 편지나 시에는 계랑癸娘 또는 계생癸生으로 많이 나온다.

 

를 아름답게 잘 짓는다 하여 詩技라고도 불렀고

 

창가에 앉아 매화나무 보기를 좋아한다하여 매창梅窓이라 하였답니다.

 

 

 

        취한 손 마음 두고 적삼 끌어 당겨

        끝내는 비단 적삼 찢어놓았네

        그까짓 비단옷 아까울 게 없지만

         님이 주신 정까지 찢어질까 두려워.

 

 

매향은 술 마시며 옷고름을 풀려고 집적거리는 손님에게

 

이런 재치 있는 시로 위기를 넘길 만큼 탁월하였다고 합니다

 

 

매창梅窓은 뛰어난 시인이었던 유희경劉希慶과의 가슴 시린 사랑을 하였으며

 

병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지내게 되는 이귀李貴

 

홍길동전洪吉童傳을 지은 허균許筠 등과도

 

교유하며 시를 주고받는 우정으로도 유명합니다.

 

 

 

허균이 가장 마음고생을 많이 하며 어려운 시기에 쓴

8권 1책으로 된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도

매창梅窓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 애계량哀癸娘 두 수가 전해오며

매창梅窓의 사람 됨됨이를 칭송하는 글이 들어있습니다.

 

연약한 듯 여자로써의 숙명을 아름답게 읊어 시기詩技라고도 할 만큼

시어詩語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시재詩才라 볼 수 있으며

노래도 춤도 거문고 솜씨도 뛰어나면서 정절의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추사秋思. 춘원春怨. 견회遣懷. 증취객贈醉客. 부안회고扶安懷 자한自恨 등이

유명하며

한시 70여 수와 시조 1수를 남겼으며

 

1668년 12월 부안 개암사에서 구전口傳되어 오던

 

매창梅窓의 한시 58수를 모아 매창집을 간행하였으며.

 

 

전북 부안군 부안읍 서외리에 가면

 

매창공원 안에 매창의 묘와 시비가 있다.

 

 

 

매창梅窓이 그토록 사랑하던 유희경劉希慶

주고받은 연시戀詩를 읽어 봅시다

.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더니           東風一夜雨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柳與梅爭春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 건            對此最難堪 

 

       잔 잡고 정든 님과 이별하는 일          樽前惜別人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娘家在浪州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我家住京口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니           相思不相見 

 

       오동잎에 비 뿌릴 제 애가 탄다오          腸斷梧桐雨 

 

 

       말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相思都在不言裡 

 

        하룻밤 맘고생에 귀밑머리 희었어요      一夜心懷鬢半絲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欲知是妾相思苦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 좀 보시구려       須試金環減舊圍

  

 

매창은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시대의 유명한 명기名妓로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양반들이 기생妓生을 분류하는 글 중에는

선해담지명기善諧談之名妓로 분류되는 기생들이 있다고 합니다.

 

조선 중종 때의 황진이黃眞伊는 38세의 짧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나

아름다운 용모와 다재다능한 명기名妓로써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킨 일화나

세상을 등지고 학문에만 열중하던 화담정사의 서경덕徐敬德을 찾아가

높은 인격에 스승님으로 평생 사모하였다는 이야기

 

당시 근엄하기로 이름난 왕족인 벽계수碧溪守黃眞伊를 만나보기를 원했으나

黃眞伊는 명사名士가 아니면 만나주지 않아

친한 손곡蓀谷 이달李達에게 방법을 물었다.

 

이달李達은 그대가 소동小童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가지고 뒤를 따르게 하여

           黃眞伊의 집 근처 루에 올라 술을 마시고 거문고를 타고 있으면

           黃眞伊가 나와서 그대 곁에 앉을 것이오.

 

           그때 본체만체하고 일어나 말을 타고 가면 황진이가 따라올 것이오.

           취적교 吹笛橋를 지날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으면 일은 성공일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할 것이오.

 

벽계수碧溪守는 그의 말대로

한 곡을 타고 취적교 吹笛橋 다리로 향하였다.

黃眞伊가 이때 벽계수碧溪守를 벽계수碧溪水로 빗대어 지은 를 읊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웨라

         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것을 들은 벽계수는 다리목에 이르러 뒤를 돌아보다 말에서 떨어졌다.

黃眞伊는 웃으며 명사名士가 아니라 풍류랑風流郞이다 라고 하며

돌아가 버렸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黃眞伊

별김경원別金慶元, 영반월詠半月,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

송별소양곡送別蘇陽谷,벽계수碧溪水, 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

박연폭포朴淵瀑布송도松都, 등의 시를 남겼다.

 

절의효지기節義孝智妓라 부르는 기생妓生들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의기義妓라 할 수 있으며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의 김섬

진주성 전투의 논개論介

평양성 전투의 계월향桂月香 등이 이에 속한다.

 

계월향桂月香은 월선月仙이란 여성이며,

김경서金景瑞 장군은 수탄장守灘將으로

평양 방위전에서 대동강을 건너오는 적병을 막았으나 평양성平壤城이 함락되자

 

계월향桂月香은 김경서金景瑞 장군을 성안으로 몰래 불러들여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副將 고니시 히小西飛의 목을 베었다.

 

둘이는 고니시의 머리채를 잡아들고 말을 타고 탈출하여야한다.

금방 발각될 시급한 상황이었는데 계월향桂月香이 말한다.

 

우리 둘이 다 탈출하려다 발각되면 둘 다 목숨을 잃게 됩니다.

나는 왜놈에게 더럽혀진 몸

나리는 나라를 위하여 큰일하실 분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나리의 칼에 죽고 싶습니다.

 

김경서金景瑞가 뿌리는 눈물에 계월향桂月香은 죽었다.

왜군倭軍의 사기도 땅에 떨어졌다.

 

이듬해 1월 평양성을 탈환한다.

평양성平壤城을 되찾는 데는 그녀의 숨은 공이 컸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전쟁영웅인 김응서金應瑞(景瑞)장군은 큰 공을 세워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거치며 포도대장에도 임명되었다

 

김경서金景瑞는 김응서金應瑞장군(1564-1624)의 또 다른 이름이며

사후死後에는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고,

고향에 그의 충성을 표창하기 위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이 모두다 계월향桂月香의 당차고 애절하며 깊고 아름다운 사랑이 아니겠는가.

사당祠堂에 찾아가 큰 절을 올리고 싶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나라에서 운영하는 기생제도는 다 없어지며

일본처럼 권번券番생겨나 큰 도시에 자리를 잡게 되고

 

궁중에 있던 예인藝人들이 사회에 나와

우리나라의 기생에 대한 좋은 전통을 이어나가고자

가무歌舞, 시, 서화書畵 등과 예절禮節에 대한 교육을 기키며

새로운 기생문화가 발생하게 된다.

 

예인藝人들의 가르침은 엄격하였으며

이에 따르는 기생들도 제가끔 품위品位를 유지하고 있었다.

 

권번제도는 8.15 해방을 맞으며 변하기 시작하다가

6.25 사변으로 서양의 새로운 문화가 급격히 들어오며 없어지게 된다.

 

지식인知識人으로 통하고 있던 기생妓生들은

나라가 위급할 때 나라를 위하는 데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과 같은 마음으로

 

1919년 3·1운동 때에는

자발적으로 독립만세운동獨立萬歲運動을 벌여

많은 기생들이 감옥에 갔으며

 

또한 적은 돈이나마 임시정부에 보낸 기생들도 많으며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몸 바친 수많은 기생妓生 독립투사獨立鬪士들이 있었다.

 

옛날의 기생들은 양반이나 사대부들 옆에서 술을 대접하거나

춤이나 노래를 하는 등 그들의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하므로 우리는 기생을 웃음과 몸을 파는 여성 정도로만 알고 있으며

황진이나 매창이나 논개 등 몇 사람 안 되는 유명한 기생들에 대해서만 조금 알고 있다.

 

1926년 이능화李能和가 지은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라는 책의 내용에 따르면

신라시대에서 부터 기생에 대한 역사와 더불어 민족혼을 일으키는 기생들이 많이 나온다.

 

이제는 기생이라는 제도가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우리시대 어려운 시절을 살고 간

眞香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영원히 사랑하는 한 남자

詩人 白石을 기리기 위하여

1997년 거금 2억 원을 드려 백석문학상白石文學賞을 만들었으며

 

일평생 갖은 고생을 하며 모은 약 1천억 원대의 전 재산을

1996년도에 길상사 吉祥寺라는 절을 만들게 하여

사회에 환원女人 眞香

 

사랑하는 한 사람

白石만을 생각하다 이승을 떠난 女人 

 

眞香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8. 찾아오는 인연因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