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 열국지( 001∼94회 )

제 12 화. 강태공의 업적은 어떠한가.

서 휴 2023. 3. 12. 06:27

12 . 강태공의 업적은 어떠한가.

 

       강태공(姜太公)은 성()이 강()이며,

       씨()는 여()이고, 이름은 상()이므로

       강상(姜尙) 또는 여상(呂尙)이라 불렸다.

       자는 자아(子牙)이며, 호는 비웅(飛熊)이다.

 

       강상(姜尙)은 위수(渭水)의 반계(磻溪)에서

       몇십 년 명상하다 주문왕(周文王)에 발탁되고,

       왕의 으뜸 스승이라는 사상보(師尙父)가 된다.

 

       이에 강상(姜尙)은 강태공(姜太公)이라는 별칭이

       생겨나며, 주문왕(周文王)이 죽자,

 

       그 아들인 주무왕(周武王)을 도와 상()나라를

       멸시키고 천하의 주()나라를 세웠다.

 

       그 공로로 산동반도(山東半島)의 영구(營丘)

       땅에 제후로 봉해져 제() 나라를 세웠다.

 

강태공(姜太公)의 생존 연대는 정확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일설에 따르면 기원전 1154년인 은()나라 경정왕(庚丁王)

태어났으며, ()의 주강왕(周康王)  6년인 기원전 1015년에

이르러 139세가 되자, ()나라에서 죽었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군주를 모셨던 많은 참모 중에

       강태공(姜太公)처럼 화려한 사람은 없었다.

 

강태공(姜太公)이 제()나라에서 죽었음에도, ()나라 왕실이

있는 풍경(豊京)까지 와서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그를 포함하여

5대손에 이르기까지 모두 풍경(豊京)에서 장사(葬事)를 지냈다.

 

       古之人有言 曰狐死正丘首仁也

       (고지인유언 왈호사정구수인야)

 

       이를 두고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여우가

       죽더라도 고향 쪽으로 머리를 둔다, 는 뜻이다.

 

예기(禮記)의 단궁(檀弓) 상편(上篇)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강태공(姜太公)이 죽은 후에도 풍경(豊京)

돌아와 장례 치르는 것을 두고 예(), 그 근본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강태공은 선()을 보기를 목마른 듯이 하고

       악()을 보기를 눈먼 사람같이 하였으며

 

       착한 일은 모름지기 탐내고

       악한 일은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언제나 자신을 남보다 귀하다 여기거나

       남을 천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며,

 

       자신을 크다고 인정하여

       남의 작음을 비웃지 않았다.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봐야 한다고 했다.

 

       즐거움은 저절로 즐거운 것이 아니고

       재앙을 염려했기에 즐길 수 있다.

 

       현명한 지도자는 눈이 밝아야 하고,

       귀는 총명하여 많이 들어야 하며,

       마음은 지혜로우며 바른 판단을 하여야 한다.

 

       장수가 지혜롭지 못하면 군대는 싸우는데

       자기의 군사(軍士)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

 

       관리는 반드시 공평하고 결백하여야 하며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참된 관리가 아니다.

 

       존재하느냐멸망하느냐

       멸망을 근심하는 데서 나온다.

 

       즐거운가아닌가하는 생각은

       먼저 재앙을 걱정하는 데서 나온다.

 

       내가 부모를 효로써 섬기게 되면,

       나의 자식도 나에게 효를 다할 것이지만,

 

       나 자신이 부모에게 불효한다면,

       자식이 어찌 나에게 효를 다하겠는가

 

사람들은 강태공이 자기의 용맹만을 믿거나, 적을 가볍게 여기지!

않은 인물이며, 정치투쟁(政治鬪爭)에 군사 전술을 접목시킨

최초의 인물이었기에 역사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시대의 흐름을 읽고,

       때를 기다릴 줄 알았던 인물이자

       군주를 가장 효과적으로 보좌했던 유능한

       정치가이자, 군사 전술가의 대명사로 꼽힌다.

 

       세상에 사람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며

       사람의 의지(意志)가 살아가는 힘이란 걸

       일깨워 주며 인식하게 한 인물이다.

 

       그는 천하(天下)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천하(天下)라는

       더욱 진보(進步)적인 인식을 보여주었다.

 

강태공은 미신과 귀신을 숭배하던 풍조를 배척하였으며, 오르지

사람의 의지가 모든 변화의 원동력이란 걸 정확하게 인식시켰다.

 

       보이지 않는 인의도덕(仁義道德)이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며,

 

       백성의 실질적인 이익과 행복을 같이 나눌 때

       나라가 잘되고, 전쟁에서도 이길 수 있다는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처신하였으므로, () 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강태공(姜太公)은 난세(亂世)를 평정한 인물이며,

       민본주의(民本主義)의 정치가라 할 수 있다.

 

강태공은 80의 나이에 시작하여, 끝내 천하를 평정시킨 인물이며,

끊임없이 노력하여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으며, 그를 볼 때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많은 책을 저술한 강태공은 중국 역사상 유일하게

       모든 분야에 걸쳐 백가(百家)의 종사(宗師)로 추앙받았다.

 

       전국시대에 유명하였던 병법(兵法) 사상가(思想家)들인

       손자(孫子). 손무(孫武). 오자(吳子). 울요자(尉繚子).

       이위공(李衛公). 귀곡자(鬼谷子). 황석공(黄石公).

       제갈량(諸葛亮). 소진(蘇秦). 등이 저마다 지은

       병서의 기초를 세우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유가(儒家)와 법가(法家)의 사람들과 천문(天文)과 역수(曆數)

와 풍수지리(風水地理) 등을 연구하여 길흉(吉凶)과 화복(禍福)

예언하는 음양가(陰陽家)들로부터도 시조(始祖)로 모셔졌다.

 

       강태공의 삼략(三略)은 감추어져 비전(秘傳)되다가,

       진()나라 말기의 황석공(黄石公)이 장량(張良)에게

       전수하여 줌으로써 세상에 드러났다고 하며,

 

       이에 장량(張良)은 황석공(黄石公)에게서

       강태공의 비서(秘書)인 육도(六韜))를 전수(傳受) 받아,

       유방(劉邦)과 함께 한() 나라 제국을 세우는

       데 이바지하였다고 전해진다.

 

강태공은 중국 최초의 병법서(兵法書)이자, 나라를 다스리는

치국서(治國書)이며 경륜서(經綸書)인 육도(六韜))를 저술하였다.

 

육도(六韜)의 도()는 감출 도()자 이므로, 병법(兵法)

비결(秘訣)을 뜻하는 것으로써, 주문왕과 강태공이 주고받은

문답(問答) 식의 이야기를 모은 책으로 나라를 경영하는

비결이 들어있다고 한다.

 

       육도(六韜)는 기원전 1천여 년 전에 쓰였으므로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된 병법서에 해당하며,

 

       이에 황석공(黄石公)의 삼략(三略)과 손자병법(孫子兵法),

       오자병법(吳子兵法). 사마법(司馬法). 울요자(尉繚子)

       이위공문대(李衞公問對)을 합하여 7대 병법서라 하며

 

여기에 손빈병법(孫臏兵法)과 장원(將苑)과 삼십육계(三十六計)

합하여 무경십서(武經十書)라 불리게 된다.

 

       사상보(師尙父)는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시오?

       주상, 백성은 다스리는 것이 아니 오며

       백성의 민심을 받쳐주어야 하나이다.

 

       백성의 민심은 큰 물결과도 같아

       잘 흘러가도록 물꼬를 터주고,

       넘치는 걸 대비하여 둑을 쌓아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법을 안 만든다는 것이오

       그렇사옵니다. 있는 법만으로도 되옵니다.

 

       다만, (). (). (). (). (. ()

       라는 여섯 가지 지켜야 할 육수(六守)를 정하여,

       백성들 스스로 지켜나가게 하는 것이옵니다.

 

       민심은 통치자보다 공평하고, 앞서가는 것이기에

       백성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먼저 살펴야 하옵니다.

 

       주상, 백성은 잘 먹고, 잘 살아가기를 원하므로,

       신은 오직 백성이 잘살도록 보살피면서

       그저 도와주고 있을 뿐이옵니다.

 

일설에 의하면, 강태공은 기원전 1034년에 신선계(神仙界)

들었었다고 하며, ()나라 왕실은 그의 의관(衣冠)

서주(西周)의 호경(鎬京)에 안장하였으며, ()나라 사람들은

강태공(姜太公)의 덕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도 강태공의

의관총(衣冠塚)을 세웠다.

 

            대기만성 (大器晩成) 이란?

 

       큰 그릇을 만들려니 시간이 더 걸려

       뒤늦게 나 마 이루어진다는 뜻이려니

 

       크게 될 사람은 속절없는 세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으며, 품은 큰 뜻을 이루기 위해

       피나는 집념으로 살아가는 것이며

 

       오르지, 다가올 때만을 기다리면서

       목표대로 달려만 가는 사람일 것이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원하는 뜻을

       이루게 된다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大方無隅 (대방무우) 큰 각은 모퉁이가 보이지 않으며

大器晚成 (대기만성)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지며

大音希聲 (대음희성) 큰소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며

大象無形 (대상무형) 큰 형상은 모양이 없는 듯하다.

 

       노자(老子)의 노자(老子) 41장에서 나오는 말처럼

       위와 같은 말로 도()의 깨우침을 비유하였는데

 

       도()는 항상 사물의 뒤에 숨어 있는 듯하여

       쉽게 단정할 수도 또, 부정할 수도 없으므로

 

       도()를 이루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에서

       대기만성(大器晚成)이란 뜻으로 쓰이게 하였다.

 

13 . 최초의 반란이 일어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