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2 화. 이제 초나라가 일어서는가.
38. 초문왕의 등장.
제 132 화. 이제 초나라가 일어서는가.
제환공(齊桓公)이 제(齊) 나라 군위에 오를
때부터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제(齊)가 노(魯)와 두 차례 전쟁에서 모두 패하는
수모를 당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하지만 이 패배는 관중(管仲)의 진가를 깨닫게
해주어 모든 국정을 일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제환공(齊桓公)이 장차 패공(霸功)이
되겠다며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때 남방(南方)에 자리 잡고 있던 초(楚) 나라가 힘을 키우더니
중원(中原)에 진출하고자 본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황하(黃河) 서쪽 끝의 진(秦) 나라에서 동쪽으로
황하(黃河)를 따라가다가 중원(中原)에 이르기 전에
황하(黃河) 남쪽의 산을 넘어 한참을 내려가면
한수(漢水)가 시작되며 초(楚 )나라 또한 시작된다.
한수(漢水)는 회수(淮水)를 만나게 되며, 그리고
티베트에서 동쪽으로 흘러오는 길고 긴 장강(長江)과
합해지면서 양자강(揚子江)이 시작되고
양자강(揚子江)은 상하이(上海)로 빠져나간다.
한수(漢水)가 장강(長江)과 만나는 곳은 지금의 우한(武漢) 지역을
말하는 것이며, 이 모두를 초(楚) 나라가 차지하고 있었다.
중원(中原)의 여러 제후국 사람들은 초(楚) 나라가
비록 물이 많고 넓은 평야가 비옥하다고는 하나,
중원(中原)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가시나무 (형荊)가 많은 형(荊) 땅이라고 하며,
인구도 얼마 안 되고 문명이 한참 뒤떨어져 있는 곳이라
하면서 형만(荊蠻), 즉 오랑캐라고 낮춰 부르고 있었다.
초(楚) 나라는 한동안 세월이 흐르자, 제17대 초무왕(楚武王) 대에
이르러 중원(中原)의 문물을 받아들이며 문화를 갖추게 되면서,
점차 주변 나라를 점령하면서 초(楚) 나라의 규모를 키워나갔다.
초(楚) 나라는 수(隨)를 굴복시키고, 권(權)을 이기고,
운(鄖)을 깨트리고, 교(絞) 와는 동맹을 맺고
한수(漢水) 동쪽의 작은 나라들로부터 조공(朝貢)을
받게 되면서 마침내 국력이 더욱 커졌다.
초무왕(楚武王) 웅통(熊通)이 한창 세력을 넓힐 때는 기원전 690년
때의 일이며, 그해에 수(隨) 나라 수후(隨侯)가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초(楚) 나라 영성(郢城)에 입조 하지 않자, 몹시 괘씸하게 생각하였다.
이에 참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수(隨) 나라에 쳐들어갔으나
이 원정 중에 초무왕(楚武王)이 갑자기 병들어 죽는 일이 생겼다.
그때는 제양공(齊襄公)이 기(紀) 나라를 멸망시킨 해와 겹친다.
모두가 알겠는가 ? 나의 죽음은
수(隨) 나라를 접수하고 난 후에 알리도록 하라!
왕이시여. 명심하겠나이다.
기필코 수(隨) 나라를 점령하고야 말겠나이다.
초(楚) 나라의 영윤(令尹 =재상宰相) 투기(鬪祁)와 왕족 출신인
굴(屈)씨 집안의 굴중(屈重)은 막오(莫敖=장수將帥)로 있으면서
상(喪)을 발하지 않고, 초무왕(楚武王)의 유언을 받들면서 숨겼다.
초군(楚軍)은 샛길을 이용하여 몰래 쳐들어가
수(隨) 나라의 도성을 기습하여 점령하라!
초군(楚軍)이 수(隨) 나라의 도성을 갑자기 덮치자, 수후(隨侯)는
몹시 두려워하며, 다시 강화(講和)를 애걸하게 되자, 굴중(屈重)이
초(楚) 나라 군막으로 수후(隨侯)를 불러 다시 맹약을 체결했다.
초군(楚軍)은 한수(漢水)를 모두 건너오자마자,
그때야 초무왕(楚武王)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초무왕(楚武王)이 재위 51년 동안 초(楚) 나라의 국력을 신장시키고
죽자, 그 아들 웅자(熊貲)가 초문왕(楚文王)이 되며, 그때부터 초(楚)
나라의 세력이 더욱 커지며 중원에 도전하는 최초의 왕이 된다.
그 때는 영윤 투기(鬪祈)와 막오 굴중(屈重)을 중심으로
육권(鬻拳), 투백비(鬪伯比), 위장(薳章), 투염(鬪廉), 등의
뛰어난 참모들이 많았다.
초문왕(楚文王)은 이들과 함께 채(蔡) 나라 등이 있는 한양(漢陽) 땅을
침탈(侵奪)하여 중원(中原)에 다가가고자, 계획을 세우면서 끊임없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우리 초(楚) 나라와 누가 감히 맞설 수가 있겠는가?
주(周) 나라나 우리 초(楚) 나라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제 중원(中原)으로 나아가 천하를 점령하고
천하의 초(楚) 나라를 세우고 말리라!
옛날 신(申) 나라의 신후(申侯)는 서주(西周) 시대의 마지막 왕인
주유왕(周幽王)의 국구(國舅)가 되어 국정에 많이 관여하였었다.
주유왕(周幽王)이 못된 포사(褒姒) 만을 총애하여
나라에 심한 혼란을 가져오자,
신후(申侯)는 융족을 끌어드려 주유왕(周幽王)을
몰아내고 주(周) 나라 왕실을 개혁하려 들었으나
실패하며, 주(周)나라는 몹시 피폐해지게 되었다.
그로 인하여 왕실은 낙양(洛陽)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으므로, 동주(東周)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동주(東周) 시대가 열리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 밖으로 제후들의 힘이 막강해지며
막강해진 힘으로 서로 각축전을 벌이면서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열리게 되었으며
그 후에 전국시대(戰國時代)까지 이어진다.
신(申) 나라는 지금의 하남성 남양시이며, 채(蔡)는 한양 땅으로서
이 두 나라는 중원으로 나가는 교통 요충지의 길목에 있는 나라다.
왕이시여. 중원(中原)으로 나아가려하나
신(申) 나라와 채(蔡) 나라가 막고 있나이다.
그래, 지금의 신(申) 나라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신(申) 나라는 작은 나라라 쉽게 점령할 수 있나이다.
중원(中原)의 제후들의 저항이 거세지 않겠는가?
신(申) 나라는 그만한 영향력이 없을 뿐만 아니오라
중원의 나라들은 오랫동안 서로 전쟁하고 있는바
제 앞가림에 급급하여 돕지 못할 것이옵니다.
초문왕이 신申 나라를 토벌하러 갈 때 등(鄧) 나라를 지나가게 된다.
등(鄧) 나라 기후(祈侯)는 세 조카인 추생(鵻甥), 담생(聃甥), 양생(養甥)
과 함께 초문왕을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어 접대하기로 했다.
주공, 초문왕(楚文王)을 죽여야 합니다!
저자가 신(申) 나라를 토벌하고 나면
우리 등(鄧) 나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럴 리야, 있겠느냐?
잘 대접해 보내면 고마워할 것이다.
만약 일찍 도모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주공께서는 크게 후회하실 것입니다!
허 어, 내가 찾아온 손님을 죽인다면
사람들은 내가 먹다 남긴 음식도 먹지 않을 것이다.
만약 저희 말을 따르지 않으신다면
나라가 망하여 사직이 제사를 받지 못할 것인데,
주공께서 무슨 남길 음식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등(鄧) 나라 기후(祈侯)는 세 조카의 말을 듣지 않았다.
초문왕은 신(申) 나라를 토벌하고 돌아오면서 등(鄧) 나라를 쳤고,
그 후에 또다시 쳐 멸망시키고 말았다.
이는 좌전(左傳) 장공(莊公) 6년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이때의 이야기를 서제막급(噬臍莫及)이라 표현하였다.
서제막급(噬臍莫及)
씹을 서噬, 배꼽 제臍, 없을 막莫, 미칠 급及.
사슴이 스스로 제 배꼽을 물어뜯으려 해도
입이 미치지 않는다는 말인데,
사향노루가 붙잡히는 것은 그 배꼽 향내 때문이라
생각해 배꼽을 물어뜯으려 한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는 등(鄧) 나라가 초(楚) 나라를 멸망시키려 해도, 이미 기회를
놓쳐, 등(鄧) 나라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렵게 되었다는 뜻이 되겠다.
초문왕(楚文王)이 신(申)을 점령하고 등(鄧) 나라까지 멸망시켰으나,
중원(中原)의 제후들에게서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았다.
신(申) 나라나 등(鄧) 나라가 그만큼 영향력이 없기도
하였지만, 당시 중원의 나라들도 제 앞가림을 하기에
급급한 실정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초문왕은 너무나 싱겁게 두 나라를 점령하였으며, 중원(中原)의
관문인 남양(南楊) 땅 일부도 차지하게 되었다.
이때가 초문왕 2년의 일이며 제양공 10년에 해당하는 해였다.
다음 목표는 채(蔡) 나라가 아니겠는가?
채(蔡) 나라는 우리와 가장 가까이 있으나
아직도 우리에게 굴복하지 않고 있도다.
왕이시여, 제 말을 들어보시옵소서.
채(蔡) 나라는 만만치 않은 제후국(諸侯國) 이옵니다.
후작(侯爵)의 작위를 받은 나라로 국력도 탄탄하며
제(齊) 나라와도 혼인 관계를 맺고 있사오며
왕실과 주변 제후국 간의 교류도 활발하나이다.
한마디로 쉽게 멸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란 말인가?
왕이시여. 그러한 나라이옵니다!
그렇다면 좋다. 잠시 두고 보자!
뭔가 좋은 기회가 오지 않겠는가?
왕이시여, 그렇사옵니다.
기다리시면 좋은 기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제 133 화. 충신은 몸을 아끼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