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 열국지( 001∼100회)

제 42 화. 왕과 인질을 교환하는가.

서 휴 2023. 4. 27. 16:43

    14. 왕과 제후의 갈등

 

42 . 왕과 인질을 교환하는가.

 

       괵()나라에 관해 알아보자,

       괵()나라는 주문왕의 동생인 희중(姬仲)

       희숙(姬叔)이 봉해진 제후국의 이름이나

 

       천하의 변천에 따라 동괵(東虢), 서괵(西虢),

       북괵(北虢), 소괵(小虢), 4가지로 변하였다.

 

       앞으로 괵()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므로

       올바로 구분해 알아야 이해하기 좋을 것이다.

 

1). 동괵(東虢)은 지금의 하남성 형양시 부근에 주문왕의 동생

희숙(姬叔)에게 봉해졌으나, 주평왕 4년에 정무공에 의해

멸망 당하여 편입되며 경성(京城)이 지어졌다.

 

2). 서괵(西虢)은 주문왕의 동생 희중(姬仲)이 봉해졌으며

() 왕실이 낙읍으로 동천 하자, 서괵(西虢)

동쪽으로 이동하여 북괵(北虢) 이라 칭했다.

 

3). 북괵(北虢)은 이에 따라 지금의 섬서성 보계시(寶鷄市)

부근에 있다가, 지금의 하남성 상양성(上陽城) 옮겼으며,

 

기원전 655년인 주혜왕(周惠王) 22년에 진()나라

진헌공(晉獻公) 치세 때 대부 순식(荀息)이 펼친

가도멸괵(假道滅虢) 작전에 멸망 당했다.

 

4). 小虢(소괵)은 서괵(西虢)의 주력이 동쪽으로 이주할 때

잔류하며 남은 세력이 유지한 나라를 일컫는다.

그 후 기원전 687년인 주장왕(周莊王) 10년에 진() 나라의

진무공(秦武公)에 의해 멸망 당한다.

 

       주평왕(周平王) 때 괵공(虢公) 기보(忌父)

       다스리는 괵()나라는 북괵(北虢)을 말한다.

 

주평왕(周平王)은 오랜만에 괵()의 괵공(虢公) 기보(忌父)

찾아오자, 반갑게 맞이하며 마음에 담겨있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요새 정장공은 너무 입조(入朝)하지 않고 있소.

       경사직(卿士職)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이오

 

       이름만 경사(卿士)일 뿐 조정에는 아무런 공이 없으니

       괵공(虢公)에게 경사직(卿士職)을 맡길까 하오

 

       주상, 아니 되옵니다

       정백(鄭伯)이 입조(入朝)하지 않은 것은

       혹, () 나라에 변고가 있는 것이 아닌지요

 

       주상, 신이 대신하여 경사직(卿士職)을 맡게 되면

       신은 정백(鄭伯)에게 미움을 사게 될 것이며,

       또한, 주상에게도 원망이 따를 것이옵니다

 

       신은 감히 어명(御命)을 받들 수 없사오니

       오늘 말씀은 듣지 않은 것으로 하겠사옵니다.

 

이때 왕실에 항상 상주하며 정장공(鄭莊公)의 경사직을 보좌하고

있는, ()의 대부 순요보(荀夭父)가 이 사실을 편지로 적어 보냈다.

 

       뭣이라고! 나와 아무런 논의도 없이

       경사직을 박탈하려 하였단 말인가?

 

       매년 우리 정나라가 바치는 공물이 얼마인가?

       우리가 아니면 왕실이 운영되겠는가?

 

       좋다, 이번 기회에 주평왕(周平王)

       버르장머리를 확실하게 고쳐놓고 말리라

 

       공자 려()와 고거미(高渠彌) 장수는

       우리 정군(鄭軍)의 위세를 크게 보이면서

       당당히 낙양성(洛陽)에 들어가도록 하라

 

대부 순요보(荀夭父)의 편지를 받아본 정장공(鄭莊公), 국내문제를

수습하느라 왕실에 가지 못하였으나, 주평왕이 이런 사정을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고, 너무 가볍게 판단하는 것에 매우 화가 났으므로,

 

이번 기회에 단단히 따져 보겠다며, 대규모의 정군(鄭軍)을 이끌고

왕실로 향하였으며, 낙양성(洛陽城) 앞에 진채(陣寨)를 세웠다.

 

       주상, 그간 건 안 하시었나이까

       허 어. 정장공(鄭莊公), 오랜만에 보는구려.

 

       주상, 아우가 역모를 저지른바, 이를 수습하느라

       경사직(卿士職)을 소홀히 하였음을 용서하시옵소서.

 

       허 어, 그런 사정이 있었소?

       주상, 신은 부자(父子) 2대에 성은을 입어

       경사직(卿士職)을 맡고 있었사옵니다.

 

       하오나, 신의 부족한 재주로 경사직(卿士職)

       계속 맡아 주상을 욕되게 할 수 없사오니,

       이제 물러나 봉토(封土)에 돌아가 살면서

       신하의 도리를 다할까 하옵니다

 

       경()이 오래 보이지 않아 걱정하던 참이었소.

       경()은 무슨 연고(緣故)가 있어.

       뜻밖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오

 

       주상께선, 괵공(虢公)에게 경사직을 맡기려는

       마음이 있으시다는 소문을 들었사옵니다.

 

       경()의 나라에 변고가 있을 것으로 보아

       잠시 맡기려 하였으나, 오해할 일이 아니오?

 

정장공(鄭莊公)이 정군(鄭軍)을 이끌고 낙양성(洛陽城) 앞에 떡하니

진채까지 세우고 말하자, 몹시 당황한 주평왕(周平王)은 서로의

오해를 풀기 위하여 여러 말로 달래보려 하였으나, 단단히 마음먹고

찾아온 정장공의 행동에 위압을 느끼게 되었다.

 

       왕실의 정사(政事)란 주상의 일이오며

       왕실의 사람을 쓰는 것도 주상의 일이옵니다.

 

       괵공(虢公)은 주상을 잘 보좌할 수 있는

       재주가 비상하오니 당연하옵니다.

 

       주상, 좋은 사람을 놔두고 오래 머뭇거린다면

       신을 권세나 탐하여 진퇴를 모르는

       아둔한 자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옵니다.

 

       이제 경사직(卿士職)에서 하루라도 빨리 물러나?

       조용히 봉토(封土)에 돌아가 살면서

       신하의 도리를 다할까 하옵니다

 

주평왕은 해명하려 괵공(虢公) 기보(忌父)를 찾았으나, 그는 이미

구설수를 피하려 급히 괵()나라로 돌아가고 없었다.

 

그제야 주평왕도 너무 경솔한 말을 하였다는 걸 후회하였으며,

그 이야기가 이렇게 빨리 새 나갈 줄은 전혀 생각지 못하다가,

정장공(鄭莊公)이 들이미는 말에 크게 당황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왕실의 주도권을 모두 잡고 있던

       정장공이었기에, 더구나 많은 정군(鄭軍)을 이끌고

       낙양성(洛陽城) 앞에 진채(陣寨)를 세우고 있었으므로

 

주평왕(周平王)은 자기의 신상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까 덜컥 겁을

먹게 되었으며, 이를 염려하여 몸 둘 바를 모르며 몹시 당황하였다.

 

       경()의 부자는 우리 주() 왕실에 큰 공을 세웠으며

       경사(卿士)로서 50여 년간이나 서로 마음이 맞았는데

       경()이 짐()을 의심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정, ()을 믿지 못한다면 세자 호()

       정() 나라에 인질(人質)로 보내면 마음이 풀리겠소

 

       신하로서 경사직(卿士職)를 맡았다가

       그만두는 것은 신하의 도리 이온데,

       어찌 세자를 인질로 맡을 수 있겠나이까

 

       그리되면 신이 주상을 강요하였다 할 것으로

       천하의 사람들에게 힐난을 받을 것이옵니다.

 

       허 어, 그렇지 않소

       경()이 치국(治國)의 좋은 방략(方略)을 갖고 있으니,

       세자에게 잘 배우고 오라 할 것이오.

 

      짐()의 제안을 굳이 물리친다면

      경()은 짐()에게 죄() 주는 것이오!

 

왕이 제후에게 더구나 다음 대를 이을 태자를 인질을 보내겠다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말을 하자, 정청(政廳)의 신료들이 깜짝 놀라며

왕의 말을 거스를 수도 없어, 궁여지책으로 중재안을 내놓게 된다.

 

       주상께 공의(公議)를 말씀드리겠나이다.

       주상께서 인질을 안 보내시면,

       정백(鄭伯)의 의심을 풀 수가 없사오니,

       서로 인질을 교환하시면 어떠실는지요?

 

늙은 주평왕(周平王)은 오히려 기뻐하며, 세자 호()를 정()

나라에 보내게 하였으므로, 정장공(鄭莊公) 또한, () 나라

세자 홀()을 인질로 왕실에 데리고 옴으로써 사태가 수습되며,

이에 정장공은 사은 숙배하며 경사직을 계속 맡아보게 되었다.

 

       이번 일로 정장공(鄭莊公)은 왕실의 세자를

       인질로 삼을 만큼 강대국으로서

       중원의 제후들을 압도하는 위명을 떨쳤다.

 

그러나 이 소문은 삽시간에 중원으로 퍼져나가며, 왕과 제후가

동등하게 인질을 교환하였다는 것은 곧 군신(君臣) 간의 예를

무시한 처사라며, 분개하는 백성과 제후들이 많이 생겨나며,

주변의 여론이 나쁘게 흘러가게 된다.


       정장공(鄭莊公)은 불한당 같은 자가 아닌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자가 맞도다

 

왕실의 태자 호()가 정()나라에 인질로 가 있은 지 1년여가

지나가자, 주평왕(周平王)이 재위 51년 만에 붕어(崩御)하였다,

 

       주평왕(周平王)은 아버지 유왕(幽王)의 방탕한 생활로

       견융의 침공을 받아 유왕(幽王)이 살해당하고

       호경(鎬京) 성이 불타 도저히 복구할 수 없게 되자.

 

       서쪽의 호경(鎬京)에서, 동쪽인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주()나라를 서주(西周)

       동주(東周) 시대로 구분하게 만든 불운한 왕이 되었다.

 

       이처럼 주평왕(周平王)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으며

       파란만장한 일생을 오래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에 정장공(鄭莊公)과 주공(周公) 흑견(黑肩)이 장례를 주관하면서

() 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세자 호()를 보위에 올리기로 하였다.

 

주공(周公) 흑견(黑肩)이 세자 호()를 모실 어가(御駕)를 호송하며

() 나라 신정(新鄭)에 도착하였을 때, 뜻밖에도 세자 호()

걸음도 못 걸을 정도로 병색이 완연하게 짙어 있었다.

 

       천자의 다음 대를 이을 태자의 신분으로 일개

       제후국인 정() 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다고

       생각하며, 크게 분개하며 한탄하다 보니

       어느새 마음과 몸에 깊은 병이 든 것이다
 
       이를 파악한 주공 흑견(黑肩)은 눈물을 흘리며,
       태자 호()를 부축하며 겨우 낙양에 당도했다.

 

43 . 왕실의 보복이 시작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