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 화. 귀신의 말도 듣는가.
제 36 화. 귀신의 말도 듣는가.
견융반(犬戎班) 임! 이번에
풍경(豊京)과 호경(鎬京)을 모두 점령하면
우리 견융(犬戎)의 시대가 열리겠습니다!
맞아,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저놈들은 우리를 융족(戎族)이라 부르고 있다.
융족(戎族) 이란?
오랑캐 족속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원래는 우리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고
저놈들은 우리한테서 쫓겨나
숨어서 농사짓던 놈들이 아니던가?
그렇게 정착하여 살면서 세월이 지나니,
이들은 집단으로 공동생활을 하게 되며
자연적으로 사회체계를 세우게 되고,
우리보다 조직을 잘 갖춘 거지!
그렇게 공동생활이 조직화 되어 안정되니,
가축(家畜)을 몰면서 풀을 찾아다니는 우리를
떠돌이 생활을 한다며 무시하게 되는 거야.
사는 지역에 따라, 사는 모습이 서로 다르게 되며
생각하는 마음도 서로 다르게 되는 것이지.
하기야. 한 지역에서 한 가지 방법으로
오랫동안 모여서 같이 살아가다 보면
그에 따른 좋은 생활 습성도 생겨나겠지!
그러니 저놈들이 우리를 오랑캐라 부르는 거야!
정말 건방진 놈들이 아니겠는가?
자. 이제 우리 견융(犬戎)의 시대를 열어 보자!
좋습니다. 반드시 좋은 나라를 건설하여야 합니다.
그렇다. 이번에 좋은 나라를 반드시 만들어 보자!
이제 밤이 아주 깊어졌도다.
다 같이 남은 잔을 들고 일어서도록 하자!
견융(犬戎)의 세 사람은 서로 기분 좋게 다짐하는 말을 나누고 있을
때, 각 군막에서는 맛있는 쇠고기와 술에 취하여 즐겁게 노래하고
춤추며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가 요란 했다.
이제 견융(犬戎)의 막사들이
모두 잠이 들어 조금 조용해졌다.
지금부터 축시(丑時)가 시작되었다.
한 시간 후에 결행한다.
졸지 말고 모두 결심을 단단히 하여라!
견융(犬戎)의 군막은 술과 고기를 먹으며 제가끔 떠들썩하다가
밤이 깊어지자, 이제는 코를 고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릴 만큼,
아무런 대비도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이때를 노려
진군(秦軍)의 암살단이 견융(犬戎)의 진채에 가까이 갔다.
3개 조(組)의 암살단은 훈련받은 데로 세 곳으로
소리 없이 움직여 순식간에 세 놈의 목을 베야 한다.
군사들은 암살단의 소식을 기다렸다가
동시에 돌진하며, 군막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견융의 오랑캐 놈들을 죽여라!
진군(秦軍)은 한시간도 안 되어 견융(犬戎)을 완전하게 장악하면서
많은 포로를 잡았다.
이에 진양공(秦襄公)은 뿌리까지 뽑으려고, 포로가 된
견융(犬戎)의 용사들을 오히려 귀가시키면서 뒤따라가
견융(犬戎)의 주민들에게 양곡을 나눠주면서, 위무(慰撫)
작전까지 완전하게 수행하며 민심까지 수습했다.
가장 강력했던 견융(犬戎)의 꿈은, 넘치는 자신감에 방심하게
되면서 어이없이 무너지고, 이를 지켜본 서융(西戎)은 감히
쳐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공손히 공물을 바치며 굴복했다.
주상. 진양공(秦襄公)인 견융(犬戎)과 서융(西戎)을
완전히 정벌하였다며 표장(標章)을 보내옵고
견융(犬戎)의 우두머리 견반(犬班)과 두 장수인
만야속(滿也速)과 패정(孛丁), 세 사람 목을 잘라
함에 넣어 보내왔사옵니다.
허허, 진양공(秦襄公)이 엄청난 일을 해냈구나!
이제부터 서백(西伯)으로써 역할을 다하도록
금포(錦袍)에 금대(金帶)와 황검(黃劍)을 하사하노라!
망설이지 말고 어서 빨리 보내주도록 하라!
진후(秦侯) 진양공(秦襄公)은 기산(崎山) 일대와 풍경(豊京)과
호경(鎬京)을 완전하게 차지하고 점령하고 난 후에, 주(周) 왕실에서
하사해준 금포(錦袍)와 금대(金帶)와 황검(黃劍)을 들고는 신료들
앞에서 감격스러워 눈물 흘리며 말했다.
이제 융족들이 더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이게 얼마 만인가?
여기까지 오는데, 100여 년이나 걸렸도다!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는가?
이제부터 나라의 규모를 제대로 갖추어 보자!
이제 우리도 태사(太史)를 뽑아,
먼저 우리 선조의 행적을 적어놓으며,
우리 진(秦) 나라의 역사를 기록해야 할 것이다
중국 신화시대의 다섯 성군(聖君)을 오제(五帝)라 불렀으며, 이는
한(漢)나라 때 대덕(戴德)이 수집해 엮은 대대례기(大戴禮記)와
중국 최초의 역사가인 사마천(司馬遷)이 엮은 사기(史記)에서도
소호(少昊).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 다섯 분을
5대 성군(聖君)이라 말하는 것이다.
진(秦)나라는 전욱(顓頊)의 후예이며, 고요(皐陶)라는
후손이, 요(堯) 임금의 스승인 사사관(士師官)을 지냈다.
고요(皐陶)의 아들 백예(伯翳)는 우(禹) 임금을 도와 홍수(洪水)를
다스리며, 산과 습지에 불을 놓아 맹수를 내쫓으면서, 백성의
생활을 직접 살피며 도와줌으로써, 영씨(籝氏) 성을 받게 되었고,
순(舜)임금 때는 가축을 이끄는 목축(牧畜)을 주관하였다.
백예(伯翳)는 약목(若木)과 대렴(大廉)이라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약목(若木)은 서(徐) 땅에 봉해져,
하(夏)와 상(商)나라 때 이미 제후의 반열에 있었다.
둘째 아들 대렴(大廉)의 후예 중에 비렴(蜚廉)이 있었는데, 그는
뜀박질을 잘하여 하루에 500리를 달렸다고 하며, 비렴(蜚廉)의
몇 대 후손에게 비자(非子)가 있었다.
비자(非子)는 견구(犬邱) 땅에 살면서 말을
잘 키워내는 특별한 재주를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주효왕(周孝王)은 견수(汧水)와 위수(渭水)
사이의 땅에서 말을 기르게 했으며, 이에
비자(非子)가 말을 잘 키우면서 크게 번식시키자,
주효왕(周孝王)은 매우 기뻐하면서 비자(非子)에게
진(秦) 땅을 하사하여 줌으로써 부용국(附庸國)이
되면서 진(秦)의 군주가 되게 하였다.
부용국(附庸國)은 세력이 미약한 제후국을 말하며. 예기(禮記)에
따르면, 영지(領地)가 사방 50리를 넘지 못하면서, 오작(五爵)
안에 들지 못하는 작은 나라를 말한다.
이에 천자에게 직접 조현(朝見)을 올리지 못하고, 오작(五爵)에
속한 제후가 조회(朝會)에 들어갈 때 옆에 붙어 들어가야 했던
처지로,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의미의 부용(附庸)이라고 칭했다.
비자(非子)는 영씨(籝氏)의 제사를 잇게 되자,
나라 이름을 영진(籝秦) 이라고 지었다.
그 후 6대를 지나 진양공(秦襄公) 대에 이르렀다. 진양공(秦襄公)은
주평왕(周平王)에게 정성껏 충성한 공로로 진백(秦伯)이 되었으며,
이에 견융(犬戎)과 서융(西戎)을 무찔러 쫓아내면서,
주(周)나라 왕실이 담당하던 지역을 차지하게 되며,
특히 기산(岐山)과 풍경(豊京)과 호경(鎬京)의 지역
일대를 차지하면서, 떳떳한 진(秦) 나라를 세우게 된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기원전 1046년. 주(周) 나라나
상(商)나라를 무너트리고, 천하의 주(周) 왕조를 세우게 되면서,
2백여 년간은 그런대로 지나갔으나, 차차 융족(戎族)들이
번성하면서, 주(周) 왕실을 끊임없는 침공하여 왔다.
융족(戎族)들의 침공에 견디지 못한 주(周) 왕실은
기원전 770년에 황하(黃河) 서쪽인 호경(鎬京)에서
동쪽의 중원(中原) 땅인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다.
주(周) 나라 왕실이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자, 진(秦)나라는 암살
작전을 감행하여, 견융(犬戎)을 완전히 와해시켰으며, 이 소식에
서융(西戎)은 겁에 질려 항복하고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때부터 진(秦)나라는 왕실이 가지고 있던 황하(黃河)
서부의 일천 리 땅을 소유하게 되며, 이에 비로써 넓은
평야와 곡창지대를 갖게 되면서 큰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다른 제후국들은 진(秦) 나라가 비록 황하(黃河) 서부의
넓은 땅을 차지하였다고 하나, 대부분 척박(瘠薄)한 산악지대가
많다면서, 이에 소득이 별로 나오지 않는 서쪽 변방의 작은 나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에 한 시인이 노래를 지어 부르게 된다.
文武當年發迹鄕 (문무당년발적향)
문왕과 무왕이 주나라를 일으킨 땅인데
如何輕棄畏秦邦 (여하경기외진방)
어찌하여 가벼히 섬진陝秦에 주었는가
岐豊形勝如依舊 (기풍형승여의구)
기풍은 예로부터 천하를 호령하는 곳이라
安得秦强号始皇(안득진강호시황)
진이 강성하여 시황(始皇)이라 부르리라.
제 37 화. 꿈에서 계시를 받는다.